나이가 들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어색하고 적응하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새로운 아비투스를 얻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의 무의식적 성향으로써 자신이 속한 계층의 신념, 행동체계와 양식에 따르는 것을 아비투스라고 했다. 아비투스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질과 자산 같은 경제적 자본, 취미 등 문화적 자본, 인맥·학맥·업맥 같은 사회적 자본, 명예와 명성 등 상징적 자본이 그것이다.
아비투스가 동일한 계층끼리는 동질의식을 갖고 아비투스가 다른 계층은 서로 선망하거나 배척한다. 아비투스는 같은 계층의 후세에 전달되며, 불평등을 야기한다. 예를 들면 상류계층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곡의 길이로 보면 먹고 사는 일에 쪼들리는 하류계층이 시간을 내어서 듣기는 어렵다. 고가의 그림을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가와 괴리가 큰 사치품을 선호한다. 다른 계층은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돈과 시간이 드는 삶을 추구한다. 계층 간 거리를 두고 다르게 보이기 위해 영역을 형성한다.
경제적 자본을 후세에 직접 물려주는 것은 고율의 상속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러나 나머지 문화적·사회적·상징적 자본을 물려주는 것에는 제한이 없다. 자녀를 서구의 좋은 학교에 보내 교육시킨다. 좋은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들어오면 적자를 보더라도 자본, 기술, 인맥을 제공한다. 웬만하면 성공한다. 아비투스가 단절되는 것은 왕조의 교체, 전쟁, 천재지변 등 극히 제한적이다. 세상에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서민이다. 신데렐라 영화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며 끝을 맺지만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왕가와 서민의 결합 같은 아름다운 순애보는 실패한다.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언제 식을지 모르는 사랑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비투스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어느 순간 포기로 끝을 맺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개천에서 난 용을 좋아하면 개천에 빨려 들어가기 쉽다. 그것도 아비투스가 다른 탓이다.
우리나라는 부모와 자녀가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시대의 급변에 따른 세대 차이가 원인이지만 아비투스가 형성되지 못한 계층에선 당연한 일이다. 부모, 자녀가 함께할 수 있는 문화적·사회적·상징적 자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가 듣는 음악을 부모가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가 듣는 음악을 자녀가 이해하지 못한다.
근대화·산업화 이후 오랜 기간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부익부 빈익빈,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 디지털 시대, 고가의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할 수 있는지가 계층을 나누는 중요한 아비투스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많은 자본과 기술이 결합될수록 좋은 결과물을 내놓고, 그 자본과 기술을 갖춘 계층의 아비투스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등 디지털 시대에도 불평등의 그림자가 보인다. 미래에는 동등한 가치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많은 사람과 기업이 최고 일류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격차를 넘어 초격차를 내야 한다고 한다. 반대로 하면 어떨까. 뒤따라오는 2위와의 격차를 줄이면 어떨까. 꼴찌와의 격차를 줄이면 어떨까. 물론 하향평준화가 아니다. 전체 시장을 키워서 후발 주자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게 디지털 대전환 시대의 가치다. 아비투스가 만드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특정 계층만 누리던 문화적·사회적 자본을 공동체 구성원이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문화, 사회, 교육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그런 일에 나랏돈을 써야 한다. 그것만이 공동체를 가꾸고 단합시키는 시작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