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더위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1971년 6월 3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포함해 8개 부처 개각을 단행했다. 이날 오전 청와대에 들어간 백두진 국무총리가 내각 일괄사표를 박 대통령에게 제출하면서 개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무총리실과 각 부처는 개각 폭과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청와대는 단행한 개각에서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를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과학기술처 등 8개 부처 장관을 경질했다. 과학기술처 장관에는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을 임명했다.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등 10개 부처 장관은 유임됐다. 윤주영 청와대 대변인은 개각을 발표하면서 “박 대통령은 새 내각이 '국민의 여망을 수렴해 실천 내각으로서 소임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튿날인 4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한 새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박 대통령은 임명장 수여 후 다과를 베풀고 “새 내각은 국민을 위해 구호가 아니라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면서 “특히 청렴한 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해서 추진하라”고 당부했다. 임명장을 받은 신임 장관들은 곧장 해당 부처로 돌아가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과학기술처는 장관 취임식을 하지 못했다. 신임 최형섭 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신분으로 미국 벨전화연구소, 바텔기념연구소 등과의 기술 도입 및 업무제휴를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김기형 전임 장관은 이날 오후 2시 과학기술처 회의실에서 3급 이상 공무원이 참석한 가운데 이임식을 가졌다. 김 전 장관은 10분여의 짧은 이임사에서 “한국 기술 진흥을 위한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한다”면서 “과학기술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인 만큼 앞으로도 한국 과학 발전의 역군이란 자세로 일해 달라”고 강조했다.
김 전 장관은 기자실에 들러서 기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청사를 떠났다. 김 전 장관은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과학기술처 출범을 주도, 1967년 4월 12일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에 발탁됐다. 그는 장관 초창기에 신설 부처의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박 대통령 앞에서도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소신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학기술처 예산편성과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과학기술처 출범 몇 개월 후인 1967년 8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산편성 회의가 열렸다. 당시 정부는 매년 8월에 이듬해 예산을 미리 편성했다. 김 전 장관의 생전 증언. “당시 경제기획원은 각 부처 예산 증액을 전년도 대비 10%선 이내로 제한했어요. 과학기술처는 그해 출범한 관계로 기준이 없어서 예산편성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과학기술처에는 인건비 수준인 10억여원만 줄 수 있다고 해요. 당시 농림부 예산이 110억원이었어요. 10억원으로는 각종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산 브리핑이 끝나자 발언 순서가 아닌 데도 번쩍 손을 들었어요.”
주위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석제 총무처 장관이 김 장관의 옆구리를 찌르며 “앉으라”고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대통령이 그를 쳐다보며 “말해 보시오”라며 발언권을 줬다. “각하, 과학기술처가 올해 출범했고 할 일은 많은데 예산 배정을 전년도 기준으로 하는 건 부당합니다. 재고해 주시길 건의합니다.”
당시 대통령 앞에서 대놓고 예산편성에 관해 반발한 장관은 그가 처음이었다. 회의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박 대통령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과학기술처 예산은 재편성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예산편성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 장관을 향해 말했다. “김 장관, 축하해. 오늘은 과학의 날이야.” 김 전 장관은 4년 2개월여 재임 기간에 범국민 과학화를 위해 '과학의 날' 제정, '과학기술개발 장기계획' 수립,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과학기술 인재 양성, 재외 과학두뇌 유치,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와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 등 한국 과학기술 발전사에 남을 굵직굵직한 일을 추진했다.
장관 퇴임 후에는 9대 국회의원으로서 과학기술 관련 입법에 앞장서는 한편 KAIST 이사장,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사장,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과우회장 등으로 과학기술계 발전에 헌신했다. 김 전 장관은 생전에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은 KIST와 KAIST 설립”이었다고 회고했다.
정부는 개각에 이어 6월 11일 오후 7시 차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재철 과학기술처 차관은 교통부 차관으로 발령 났다. 이재철 차관은 자신이 교통부 차관으로 발령 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기자들의 전화를 받고 “내가 아닐 겁니다. 혹시 이재설 재무부 차관을 잘못 아신 게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이 차관은 교통부 차관에 이어 인하대 중앙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인이기도 하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차관 인사 이튿날인 12일 오전에 박 대통령을 대리해 신임 차관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격려했다. 그렇다면 최형섭 장관은 언제 장관 임명 사실을 알았는가. 그는 미국 출장 중인 6월 3일 오전 5시(현지시간)에 투숙한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국제전화를 받고 장관 임명 사실을 알았다고 증언했다.
최 장관의 생전 회고. “국제전화로 장관 임명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장관 자리를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최 장관은 6월 12일 워싱턴을 출발해 14일 오후 7시 10분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공항에는 과기처 간부들이 나와서 최 장관을 맞이했다. 박 대통령은 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최형섭 신임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지각 임명장 수여식이었다. 박 대통령은 최 장관에게 임명장을 준 뒤 “한국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자리에 앉아요.” 박 대통령은 최 장관이 자리에 앉자 빙그레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과학자들은 한동안 행정을 하다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소. 그러니 최 장관도 2~3년 일하다가 다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돌아가시오.” 박 대통령의 이 말에 최 장관은 할 말이 없었다. 최 장관이 하고 싶은 말을 박 대통령이 먼저 했기 때문이다. “각하, 잘 알겠습니다.”
최 장관은 과학자로서 원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장관 발령 소식을 듣고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최 장관의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 “당시 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운영이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제강에 관한 연구였다. 장관 취임으로 직접제강법 개발 꿈이 사라져 버렸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최 장관은 곧바로 과학기술처로 돌아와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과학기술 행정 업무를 시작했다. 최 장관은 이후 남다른 과학기술 리더십으로 박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아 7년 6개월이란 국내 최장수 장관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요샛말로 '넘사벽'으로 남아 있다. 정부는 최 장관이 취임하자 15일 공석인 과학기술처 차관에 이창석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임명, 발령했다. 이 차관은 문교부 문화국장과 교통부 차관을 지낸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출범하면서 상임감사로 일했고, 이어 부소장으로서 최 장관과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그는 교통부 차관을 지낸 지 6년 만에 과기기술처 차관으로 재발탁된 것이다. 최 장관이 떠나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18일 이사회를 열고 심문택 연구담당 부원장을 소장대리로 선임했다. 심 소장은 이후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으로 7년 5개월 재임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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