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주의' '미니멀리즘'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 우리의 삶에 목적을 부여하고 기쁨과 의미를 주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줄이고 줄여 나가는 방식이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애플의 성공 방정식이었고, 스티브 잡스 자신의 생애도 미니멀리즘적이었다. 오늘날 샤오미를 비롯한 많은 IT 회사가 단순 디자인을 추구한다.
인간에게 컴퓨터는 도구다. '존재론'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도구(사물)를 사용할 때 그 '쓸모'로 사용할 뿐 '도구 자체'를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만년필로 글을 쓸 때 글쓰기에 집중할 뿐 도구인 만년필의 존재는 우리 눈에 띄지 않으며 우리 생각을 방해하지 않음이 바람직하고, 이제 만년필은 내 삶의 일부분으로 '존재'한다.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만년필은 과시욕을 드러내거나 불안을 숨기기에 적합할 수 있겠지만 좋은 글쓰기 도구는 아니다. 현대 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우려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휴버트 드라이퍼스의 계보를 잡스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계승한다. 좋은 도구란 나의 삶 속으로 '사라지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도구다.
땅에 씨앗을 뿌려서 씨앗 스스로 싹트고 성장하며 드러내는 존재가 들려주는 목소리에 주목해온 옛 기술과 달리 현대 기술은 농약을 뿌리고 온도와 영양분도 다 조절해서 생산량을 극대화하도록 씨앗을 들볶고 닦달한다. 씨앗의 고유성과 다양한 가능성이 제거되고 관계성은 비인간화된다. 현대 기술의 탐욕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대상화해서 기계 부속품처럼 잔뜩 쌓아놓고 사용 및 폐기한다. 모든 것은 그저 자원이고 부속품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닦달하고 부속품으로 해체해서 생산성을 극대화했지만 막상 그다음 상위 단계로의 도약에 필요한 지혜의 눈과 귀는 가려졌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라클'은 삶에 대한 영감과 통찰력, 신탁과 예언을 들려주는 자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데이터베이스(DB) 회사인 '오라클'은 멋진 이름을 가졌다. DBMS는 데이터에 질문을 던지면 신탁처럼 답을 들려주는 시스템이다. 한때 세계 최고 회사로 도약하던 오라클의 행보가 예전만 못해 보인다. 얼마 전 창사 이래 최대인 34조원을 들여서 의료정보 회사 서너를 인수했지만 막상 오라클엔 심각한 악재로 인식됐다. 창업자 래리 앨리슨이 서너 인수로 전미 통합 의료DB를 구축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오라클 DBMS는 튜링상 수상자인 에드거 커드의 관계형 모델과 SQL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청년 앨리슨의 성공신화다. 복잡 방대한 데이터는 관계형 '보이스-커드 정규형'의 미니멀리즘과 고성능 DBMS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다채롭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라클이 됐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의 성장은 계속됐고, 급증하는 비정형 데이터 앞에서 정형 데이터를 위한 관계형 모델은 초라해졌다. 의료 데이터는 대부분 비정형 자유 텍스트로 맥락 의존성이 높고, 시맨틱이 복잡하며, '온톨로지'가 부재한다. 영상과 신호 등 멀티미디어는 덤이다. 유전체 DNA 서열은 악몽이다. 관계형 모델로는 결코 다룰 수 없다는 뜻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관계형DB는 쓸 수 없어서 계층형DB를 사용했지만 데이터 처리 성능의 한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성능 관계형DB로 옮겼을 뿐이다. 의료데이터에 내재된 다면성과 상호의존성, 풍부한 의미론은 고성능 데이터 처리라는 욕망 앞에 폐기됐다. 현대 기술의 욕망은 인간 자신의 '디지털 분신'인 건강 데이터마저 들볶고 닦달해서 편협한 관계형 테이블에 억지로 구겨넣고 신탁과 예언을 기다린다. 쉽지 않다. 구겨진 '존재'는 스스로 '은폐'한다. 짓눌린 것들을 데이터 기술자의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꺼내 고문하듯 쥐어짜서 파편적 출력물을 얻을 뿐이다. 의료데이터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미니멀리즘적 오라클의 구축에 풍부한 '시맨틱' '메타데이터' '온톨로지'는 필수다. '온톨로지'의 다른 이름이 하이데거의 탐구 주제였던 '존재론'이다. 오라클 DBMS 같은 고성능 관리시스템도 필요하다. 그래프형, 객체관계형 모델들이 시도됐지만 커드의 관계형 모델 수준의 이론에 도달하지 못해 아직 성공적이지 못하다.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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