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초 어느 날. 연두순시차 지방에 내려간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를 불렀다. “국방부 장관과 전화를 연결하게.” “예, 각하.” 비서가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도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진노했다. “전국 통화가 가능한 전화시스템을 만들도록 하시오.” 이 지시가 국산 전자교환기 개발의 시작이었다. 대통령 지시에 경찰 출신인 당시 경호실 통신처장이 정만영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제2부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히 협의할 일이 있으니 청와대로 오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입니까?”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구소는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고 과학기술 인재 집합소였다. 경호실은 박 대통령이 지시한 전화 문제를 해결할 기관은 연구소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청와대로 들어간 정만영 부소장에게 통신처장이 자리를 권하며 본론을 꺼냈다. “박사님, 서울과 부산·대전·광주·대구 등 전국 5대 도시에서 청와대와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전자교환기를 만들 수 있습니까?”
당시 청와대는 미국 모토로라 무선전화시스템을 사용했다. 그 시스템으로 서울을 비롯한 5대 도시와 통화했다. “기한은 1년입니다. 이 일은 보안 사항입니다.” 정 부소장은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연구소로 돌아온 정 부소장이 이런 사실을 한상준 소장에게 보고했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했지만 연구소는 전자교환기를 개발한 경험이 없었다. 걱정하는 내부 소리가 적지 않았다.
정만영 부소장은 당시 안병성 방식기기실장실로 갔다. “안 실장, 청와대에서 각하가 전화 한 대로 자동 연결하는 전자교환기를 1년 안에 개발해 달라는 데 만들 수 있겠소.” “무선 통신기술은 미국 장비가 제일인데 왜 우리한테 맡기는 겁니까?” “그건 보안 때문이오.” 연구소는 정만영 부소장 책임 아래 안병성 실장이 팀장직을 맡고 10여명으로 개발팀을 구성해서 2개월여 동안 연구 조사를 진행했다.
개발팀은 청와대가 요구한 교환기는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 등에서 일부 정보기관에서만 사용하는 특수교환기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개발팀은 미니컴퓨터인 미국 DG의 '노바01'과 DEC사의 'PDP-11'을 제어용으로 이용하면 청와대가 요구한 특수목적용 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청와대는 '이 일을 비밀로 추진해 달라'고 연구소에 요청했다. 연구소는 '메모콜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1972년 6월부터 교환기 개발에 착수했다. 개발 시한은 1973년 3월까지였다. 청와대 프로젝트지만 예산은 체신부가 지원하기로 했다. 개발비는 거액인 6000만원이었다. 연구소는 개발팀 연구원을 30여명으로 늘리고 역할을 분담했다. 하드웨어의 제어 부문은 여재흥, 아날로그 부문은 이주형, 소프트웨어 부문은 천유식, 통신로 부문은 박항구가 담당했다.
개발팀은 일본에서 미니컴퓨터 '노바01' 3대를 들여왔다. 이를 기반으로 전자교환기 사양을 설계하고 이를 지원할 소프트웨어 개발을 시작했다. 성기수 전 동명대 총장(당시 연구소 전산실장)의 증언. “정만영 부소장 요청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해 천유식 박사를 비롯한 일부를 개발팀으로 보냈어요. 이후 전산실 인력을 선발해서 절반을 개발팀에 파견했지요. 최고 인재들이었습니다.”
당시 개발 환경은 열악했고, 프로그램 도구로는 어셈블러와 2진 로더가 전부였다. 소프트웨어 부문을 실질적으로 이끈 천유식 박사의 회고. “거의 날마다 철야 작업을 했어요. 당시 이 일은 변희성씨가 팀장이고, 이춘희·이대식·양광숙·우치수씨와 저 등으로 팀을 구성했어요. 우리 팀이 국내 최초로 전산교환기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정만영 부소장도 아침과 저녁 또는 밤늦은 시간에도 수시로 개발팀에 들러서 “잘돼 가, 진전이 있어”라며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통화로를 담당한 박항구 박사의 증언. “저는 기업에서 근무하다 뒤늦게 개발팀에 합류했어요. 통신로를 담당했는데 안병성 박사가 직접 설계도를 그려서 이를 구현해 보라고 지시하곤 했습니다.”
연구소는 청와대가 요구한 전자교환시스템용 소프트웨어를 '노바 01' 환경에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노바01' 컴퓨터가 연구소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핵심인 시분할 기능을 지원하지 못한 것이었다. 낙담한 개발팀은 대안을 모색했다. 고심 끝에 시분할 기능을 실시간으로 지원할 수 있는 '노바01' 호환 컴퓨터를 자체 개발하기로 했다. 국산 1호 컴퓨터 개발의 출발점이었다.
개발팀은 1973년 초 '노바01'의 성능을 분석해서 독자 컴퓨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노바01' 기종과의 호환도 됐다. 이 컴퓨터가 우리 노력과 기술로 개발한 첫 국산 컴퓨터였다. 연구소는 이 컴퓨터를 '세종1호'라고 불렀다. 세종1호 개발에는 강진구 박사가 핵심 역할을 했다.
안병성 당시 실장의 생전 술회. “이 컴퓨터는 같은 기종의 미국이나 일본 제품보다 장점이 많았다. 특히 외산에 의존하던 컴퓨터를 국산화해서 외국산 기종에 비해 3분의 1 이하의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 프로그래밍 기술을 채택할 수 있고, 이중 프로세서 구성이 가능해 높은 신뢰성을 확보했다.”
개발팀은 1973년 3월 240선 용량의 특수목적을 띤 전자교환시스템을 개발했다. 연구소는 세종1호와 연결한 이 전자교환시스템을 'KIT-CCSS'(Computer Controlled Switching System)로 명명했다. 국내 기술진이 최초로 개발한 전자교환기였다. 대통령 경호실은 그해 3월 서울 광화문 전화국에서 연구소가 개발한 전자교환시스템 성능시험을 했다. 당시 광화문 전화국에는 청와대 전용 교환시설이 있었다.
성능시험에는 청와대 경호실 통신 관계자와 안병성 연구소 실장, 이주형 박사 등과 박성득 광화문 우체국 기계과장(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 참석했다. 박성득 협회장의 회고. “성능을 시험한 결과 통화는 가능했어요. 다만 통화 품질이 완벽하지 않고 다소 불안정했어요. 경호실은 '교환기 성능과 보안성을 보장할 수 없다'며 교환기 개발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어요. 경호실이 교환시스템 안정성과 보안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던 거죠.”
청와대 측은 대신 개발비와 관련해 'KIT-CCSS' 상용화를 통해 개발비를 보전받으라고 통보했다. 체신부도 청와대 조치에 따라 개발비 6000만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연구소는 당시 실별 독립채산제였다. 안병성 실장은 개발비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안 실장은 세종1호 상용화 방침을 세우고 국내 업체에 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했으나 나서는 곳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 GTE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안병성 실장의 생전 회고. “당시 거래하던 GTE 측에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제품을 보러 연구소로 왔다. 우리 시스템을 보더니 '성능이 놀랍다'며 본사에 보고했다. 미국 GTE 본사는 기술자 5명을 한국에 파견해서 일주일 동안 기술을 검토했다.”
GTE 측은 제품의 성능과 기술을 검토해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GTE 측은 50만달러에 500회선 규모의 사설 전화교환기를 공동 개발할 것을 연구소에 제안했다. 1974년 4월 연구소와 GTE는 전자교환기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해외 최초 용역수출이었다. 안 실장과 연구진은 GTE 지원으로 1975년 'KIT-CCSS'를 보완한 'KIST 500'을 발표했다.
미국 GTE는 'KIST 500'과 세종1호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1977년 2월 삼성과 50대50 합작인 삼성GTE를 설립했다. 삼성은 이후 GTE 지분을 전량 인수해서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출범했고, 1988년 11월 삼성전자에 합병했다. 연구소가 개발한 전자교환기는 이후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의 모태로, 한국통신혁명의 불씨로 작용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개발은 축적의 산물이자 연구진의 땀과 열정의 결정체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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