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 리좀형 모델의 의미와 한계](https://img.etnews.com/photonews/2209/1569031_20220912113339_174_0001.jpg)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상(이데아, 진짜)과 현실(가짜), 신(창조주)과 인간(피조물)의 오랜 이분법적 전통이 수직적 지배·통제시스템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뿌리, 줄기, 가지, 잎 등 요소 간에 변함없는 체계와 역할을 갖춘 식물처럼 기존 사회를 동질성·반복·고착을 거듭하는 수목형 모델로 보았다.
이에 비해 리좀형 모델은 땅속에서 줄기가 뿌리처럼 불연속적으로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 같은 것을 말한다. 질서·위계 없이 뻗어 나가며, 다른 것과 접속·일탈·분해·결합·중단·재개를 거듭한다. 원칙·질서와 그에 따른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땅속에 장애가 있으면 부딪쳐서 뚫거나 결합하고, 우회하며 확장한다. 접속과 일탈은 반드시 같은 것과 이뤄질 필요가 없고, 다른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체계나 원칙, 시스템에 갇히지 않은 이질적인 것이 결합하고 떨어지면서 또 다른 이질적인 것을 만든다. 영토화·탈영토화·재영토화가 거듭된다.
꽃은 벌을 끌어들이기 위해 벌의 색깔을 모방하면서 꽃이라는 자신의 영토를 벗어난다. 그 결과 벌은 꽃의 색깔까지 자신의 영토로 확장한다. 그러면서도 벌은 꽃의 번식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영토를 벗어난다. 꽃은 벌에 의해 꽃가루가 옮겨지면서 또 다른 영토를 구축한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진 않음은 물론이다. 리좀형 모델은 기존에 구축된 사항을 단순히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질적인 것과 접속·일탈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도를 그려 나간다. 과거를 재현하지 않고 현실을 끊임없이 바꾼다.
디지털 시대의 리좀형 모델은 의미가 있을까. 인터넷을 보자. 미국 국방부가 군사정보 관리를 위해 만든 컴퓨터 네트워크를 개방하면서 인터넷이 돼 세계를 연결했다. 상거래, 엔터테인먼트,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형태로 접속·일탈·변형을 거듭했다. 동시다발적이고 이질적이며 불연속적인 확장은 한두 국가의 규제로 막을 수 없었다. 음란물, 피싱, 도박, 사기, 사생활 침해 등 범죄도 발생했지만 법령이나 자율규제 등과 충돌·우회·순응하면서 발전했다. 오프라인에 준하는 온라인 세상을 만들고 메타버스로 영토를 확장하는 리좀형 모델이다.
블록체인은 어떤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든 사용자가 거래 데이터를 자신들의 컴퓨터에 분산·저장한다. 거래 데이터 기록 장부를 블록이라 하고 시간대에 따라 블록을 체인처럼 연결했다. 모든 사용자가 거래 내역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위·변조가 어렵고, 모든 참여자의 거래 데이터를 공격하지 않으면 해킹도 쉽지 않다. 중앙관리자도 필요없다. 나카모토 사토시는 블록체인 기술로 채굴을 통해서 비트코인을 발행하고 유통하는 데 중앙은행 등 관리자가 필요없음을 보였다.
다만 암호화폐는 등락폭이 커서 투기성이 지적되고 자금세탁에 활용되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블록체인은 기존 산업과 끊임없이 접속·일탈·분해·결합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낡은 규제에 부딪치며 중앙통제장치와 타협을 이뤄서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면 리좀형 모델이 될 수 있다.
리좀형 모델은 법·규제가 많은 나라에서 유용하다. 정부 등 관리자의 눈에 띄지 않는 땅속처럼 잘못된 법·규제의 허점을 찾아 아이디어 등 다양한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접속, 일탈, 분해, 결합 등을 거듭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 법·규제 등 장애물을 뚫고 나가거나 우회하며 부딪쳐서 나뉘고 나뉜 것이 또 다른 것과 접속·일탈·분해·결합을 이뤄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예측하지 못한 세상과 가치를 만들자. 그렇다고 생명·신체의 안전과 인간의 가치를 훼손해선 안 된다. 과학기술, 정보통신 등 각 분야에서 끊임없이 리좀형 모델을 실험하고 만들어 가는 것만이 꽉 닫힌 대한민국의 미래를 연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