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은 백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이후 '백신 주권' 필요성도 더욱 커졌다. 코로나19 백신으로 처음 상용화된 메신저리보핵산(mRNA) 플랫폼을 비롯해 치료백신과 개량백신 등 차세대 백신 개발 경쟁도 뜨겁다.
백신은 외부 바이러스와 세균 감염 예방을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최근에는 감염병과 만성질환을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한 치료용 백신 개발도 진행된다.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에 대처하는 신속대응백신을 비롯해 현재까지 개발되지 않은 새로운 질환을 예방하거나 기존 백신 효능을 향상하고 투여경로를 다양화하려는 노력도 차세대 백신 개발 범주에 포함된다.
경기도 판교 차바이오컴플렉스에 위치한 차백신연구소에서 만난 염정선 대표는 “차백신연구소는 차세대 백신 개발을 위해 적합한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는 회사”라고 소개했다.
차백신연구소는 독자 개발한 면역증강 기술을 기반으로 면역을 통해 감염병이나 만성질환을 치료하는 치료백신과 항암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백신을 맞아도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 무반응자용 예방백신, 그동안 개발이 어려웠던 노로바이러스 같은 질환을 타깃한 예방백신, 주사제 대신 혀밑에 넣는 설하정 형태 코로나19 백신 등 다양한 차세대 백신을 개발 중이다.
차바이오컴플렉스는 차백신연구소 연구개발(R&D) 전진기지다. 차 의과학대학교, 종합연구원, 차병원, 차바이오텍 등 차병원·바이오그룹 산·학·연·병 계열사가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어 백신과 치료제를 함께 쓰는 병용치료 확대에 대응하기 용이하다. 차백신연구소는 최근 연구실 공간을 1.5배 확장하고, 연구인력도 대폭 늘렸다.
염 대표는 “지난해 코스닥 상장으로 제품 개발을 가속할 전환점이 마련됐다”면서 “공모자금을 바탕으로 인력을 강화하고 기존 성남 상대원동에 위치했던 연구설비를 통합해 개발 단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 진행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이곳에는 △백신 핵심 요소인 항원 개발을 위해 세포를 배양하고 정제하는 생산공정 △효능 실험을 하는 동물실험실과 면역반응 분석시스템 △제조된 물질이 설정한 기준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는지 품질관리(QC)하는 분석시스템 등이 모두 갖춰져있다. 기초연구부터 전임상·임상에 걸쳐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연구 인력도 다수 일하고 있다.
차백신연구소 핵심 기술인 면역증강제 플랫폼 '엘팜포(L-pampo)'와 '리포팜(Lipo-pam)' 개발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면역증강제는 백신 면역 반응을 증가시키거나 조절할 수 있는 첨가물을 말한다. 백신을 면역증가제와 같이 투여하면 강력한 면역반응이 유도돼 면역증강제가 포함되지 않은 백신을 단독 투여할 때보다 효과가 향상된다. 백신 효과도 더욱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기존 면역증강제가 항체 형성만 촉진한다면 차백신연구소 면역증강제는 항체 형성뿐만 아니라 체내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면역 반응을 유도하기 때문에 면역 증강 효과가 뛰어나다. 항원만 바꾸면 다양한 파이프라인에 적용할 수 있어 확장성이 뛰어난 플랫폼이라는 강점도 있다.
현재 면역증강제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차세대 백신을 개발 중이다. 만성 B형 치료백신, 무반응자용 예방백신, 재조합 대상포진 백신 등이 임상 단계에, 코로나19 백신, 노인용 독감 백신, 노로바이러스 백신 등이 전임상 단계에 있다. 항암백신, 면역항암제 등 항암 분야로도 파이프라인을 확장하고 있다.
가장 개발 단계가 빠른 만성 B형간염 치료백신은 현재 임상 2상에 진입했다. 세계적으로 B형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람은 약 20억명이고 만성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는 2억6000만명에 이른다. B형간염은 간암이나 간경변을 일으키는 위험 요인이지만 현재 표준치료제인 항바이러스제는 바이러스 증식만 억제할 뿐이고, 만성 B형간염을 완치할 수 있는 치료제는 아직 없다. 차백신연구소가 개발하면 세계 최초다. 오는 11월까지 투약을 마치고 내년까지 약효와 안전성을 확인하는 기간을 거쳐 임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2027년 8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대상포진 백신 시장을 겨냥해 재조합 대상포진 백신도 개발 중이다. 현재 사용하는 생백신보다 뛰어난 효능이 확인된 재조합 백신이다. 올해 5월 두 번째 임상시험계획(IND)을 제출하고 식약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면역증강제를 활용한 항암백신과 면역항암제도 개발한다. 항암백신은 독성이 낮아 다양한 항암치료제와 병용요법에 활용할 수 있고, 암 재발도 방지하는 다기능 항암치료제다. 차백신연구소는 지난 7월 분당차병원 암센터와 공동연구를 통해 엘팜포가 강력한 항암면역반응을 유도하고 면역관문억제제와 병용했을 때 치료 효과를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항암백신 개발사 애스톤사이언스와 체결한 2000억원대 기술계약도 애스톤사이언스가 개발한 항암 백신과 엘팜포를 병용 투여했을 때 항암 면역원성이 증가하는 시너지 효과가 바탕이 됐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대비한 차세대 코로나19 백신도 개발 중이다.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코로나19와 독감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콤비 백신이 대표적이다. 글로벌헬스기술연구기금 지원을 받아 스위스 바이오 기업 바이오링구스, 국내 팬젠과 함께 혀밑 투여가 가능한 설하형 코로나19 재조합 단백질 백신 개발에도 착수했다. 혀 아래에서 녹여 점막으로 흡수하는 방식의 설하형 백신은 주사제와는 다른 새로운 백신 전달 경로로 아직 상용화된 제품이 없다. 병원체 주침투 경로인 호흡기, 소화기 등 다양한 점막조직에서 광범위한 면역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현재 가능성을 확인하는 상태다.
◇[인터뷰]염정선 차백신연구소 대표
“백신은 지난 200여년 동안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비용 대비 효과가 뛰어난 바이오 의약품입니다. 면역증강제 개발, 역백신학 같은 새로운 기술과 mRNA 같은 새로운 백신 플랫폼이 도입되고 인체 면역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그동안 개발이 어려웠던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노로바이러스, 결핵 등 새로운 질환을 타깃한 백신 개발이나 항암백신, 만성 B형간염 치료백신, 비만백신, 치매백신 등 만성질환에 대한 치료백신 개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존 백신 한계를 극복하는데 면역증강기술 중요성이 큽니다.”
염정선 대표는 차세대 백신 개발에 있어 면역증강기술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염 대표는 2000년 차백신연구소 전신인 백신 개발 벤처기업 두비엘을 공동 창업했으며, 지난 2011년 차바이오텍에 인수된 이후 2014년부터 차백신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차병원·차바이오그룹 편입이 기초연구개발에서 임상과 제품 개발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면, 지난해 코스닥 상장 이후에는 제품 개발 가속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세계 최초 만성 B형간염 치료백신 개발에 성공할 경우 시장에 미칠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국제협력으로 진행되는 설하형 코로나19 백신 개발은 감염병 대응 의미도 있지만 냉장유통 인프라나 백신을 접종할 의료진이 없는 저개발 국가에도 백신 효과를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설하형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이를 기반으로 여러 백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이후 차세대 백신 대명사로 통하는 mRNA 백신 개발도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해왔다. 독자 개발한 면역증강제 리포팜이 mRNA 전달체 역할과 동시에 면역증강 효과가 있는 점에 착안해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염 대표는 “mNRA 백신은 예측하지 못한 감염병에 대한 신속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직 효과나 안정성 측면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모든 백신을 mRNA 형태로 개발하는 것은 부정적”이라면서 “mRNA 백신에 적합한 타깃을 발굴해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 시도가 이뤄지는 가운데 백신항원 선택, 효능 지표 등에 AI 기술 적용도 준비하고 있다.
염 대표는 국내 백신 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의 원천기술 지원과 규제 개선 노력, 인력 양성 노력과 함께 산업계에서도 기술개발과 규제 대응 역량을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기술 개발에는 지름길이 없기 때문에 유행에 따라 이뤄지는 정부 지원보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진행할 전문가 조직이 필요하고, 원천기술과 기반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에도 지속 지원해야 한다”면서 “규제기관의 규제 개선 및 전문성 확보 노력과 함께 기업이나 연구기관도 규제기관 요구사항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전문성과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현장에서는 전문 인력을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토로가 많다”면서 “기업에서도 최대한 실험을 자동화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시점에 전문인력 양성에 대한 고민과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현정기자 i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