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과 함께 군부정권에서 전문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 시대를 개척했다. 한국전쟁을 학도병으로 직접 겪은 그는 1961년 고국의 부름을 받고 영국에서 돌아와 '자유(정치)'와 '배부름(경제)'을 현대국가 이념으로 제시했다. 또 '과학기술 개발'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꼽고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The Vision of Korean Techno-Cracy)'을 그렸다.
30대 초반이던 1960년대 대통령 경제수석,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총장(장관급) 3개 중책을 겸하며, 조선·철강·석유화학·기계·전자 분야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설계한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은 한국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시대를 지나 1980년대 '기술혁신 중심 산업국가'로 본격 전환하는 로드맵이 됐다. '불가능하다'라는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 주력 산업으로 관철시킨 조선, 철강, 반도체 산업은 한국을 세계적 기술 강국으로 도약시켰다.
신 회장은 전자신문 창간 40주년 특별인터뷰에서 “한국이 테크코리아 4.0 시대를 맞아 기술 초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패스트 팔로어'로 성장했던 과거 방식을 과감히 탈피해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면서 “기후변화 시대 인류 공멸을 막을 수 있는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기술과 같이 세계 누구도 선점하지 못한 미래 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엔지니어로서 마지막 소임으로 CCUS 시장 개척을 꼽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미래 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는 91세 현역 '테크코리아 설계자' 신 회장을 만났다.
대담=양종석 전자신문 산업에너지환경부 부장
◇끝내 거절 못 한 고국의 부름
신 회장은 한국전쟁 후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해양 강국 현장에서 기술 역량을 지속 개발했다. 스웨덴 찰머스 공과대학원, 영국 더럼 공과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을 지낸 그는 5·16 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기술고문 요청을 수 차례 거절했다.
“1961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다. 먹을 쌀이 없어 아사자가 발생하던 보릿고개였다. 수출품이 고작 가발, 생선뿐인 1차 산업 시대에 어떻게 4000만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생사를 오가는 전장을 직접 경험한 만큼 폐허가 된 한국이 과연 역경과 고난을 겪고 헤쳐나갈 수 있을지 비참했다. 박 의장의 부름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해양 강국 영국을 거울삼아 국가재건 실마리를 찾고자 일주일에 한 번씩 영국대사관을 통해 신 회장의 귀국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작은 섬나라임에도 세계를 제패한 영국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분단국가 한국이 상황이 같다고 봤다. '조선입국' '바다개척'이라는 통수권자의 강한 의지를 본 신 회장은 결국 귀국을 결심했다.
“영국, 독일, 일본 등 기존 조선 강국들은 수백개 기계산업을 토대로 종합 조립산업으로서 발전시켰다. 이처럼 조선공업은 어마어마한 기술, 시설, 돈이 필요한데, 한국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모두가 불가능한 것에 돈 쓰지 말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역발상을 했다. 농사를 짓고 면직물을 만드는 건 그대로 진행하고, 만약 한국이 조선공업을 한다면 이런 기반 산업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조선산업 발전 마스터플랜'을 짜서 박 의장에게 보고했다. 조선산업을 하려면 2차 산업의 쌀이라 할 수 있는 철강부터 전자·전기, 기계산업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엔지니어의 설계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30대 초반 청년의 열정과 신념을 믿어준 통수권자 의지가 강했고 국운도 따라줬다. 한국은 불과 25년 뒤에 일본, 독일, 영국, 스웨덴을 물리치고 세계 시장점유율이 60%를 넘는 세계 1위 조선 강국이 됐다. 다양한 기반 산업도 함께 발전해 한국이 2차 산업을 넘어 3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기반이 닦였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로드맵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
신 회장은 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하에 주변의 시기, 질투, 모함에도 파격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내놨다. 특히 1965년 설계한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은 한국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시대를 지나 1980년대 '기술혁신 중심 산업국가'로 본격 전환하는 과학기술 로드맵이 됐다.
“국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한 끝에 현대국가 이념을 담아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을 제시했다. 국내외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국민이 자유롭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어떻게 하면 '자유'와 '배부름'이라는 국가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연도별 계획과 중장기 로드맵을 그렸다. 1970년대를 지나 1980년까지 관통하는 과학기술정책 내비게이션을 만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이 방향대로 지나왔다.”
초대 경제수석으로 국민이 배부른 국가 건설을 위해 '고도 경제성장'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시장개방' '기술개발' '재원확보' 전략을 담아냈다. 1차 연도에는 '에너지자원개발'과 '기간산업육성'을 목표로 공산품 비중을 늘려 수출무역 구조를 변경한다면 8% 경제성장률을 지속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2차 연도에는 '자립경제기술 기반조성'을 목표로 자본형성과 과학기술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장기적으로 1970년대는 중진공업국 기반을 완성하고, 1980년대는 보다 많은 국민이 빠르고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이 가능한 과학사회를 건설하고, 국제사회발전에도 기여해 국제공동이익을 위한 협조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과학기술 자립 초석이 된 KIST
신 회장 사무실에는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준공식 사진이 놓여 있다. 신 회장은 '과학민주사회' 구현을 위해 박 전 대통령을 설득, 한국 원조에 우호적인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의 1965년 방한을 계기로 KIST 설립을 주도했다. 박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부총리, 초대 과기장관, 비서실장, 최형섭 초대 KIST 소장 등과 함께한 역사적 순간이다. 사진 속 인물 중 실존자는 신 회장밖에 남지 않았다.
“존슨 대통령이 방한에 맞춰 깜짝 선물을 줄 계획을 알렸는데 무엇이 좋을지를 두고 당·정·청 논의가 벌어졌다. '여의도 광장에 워싱턴 타워와 같은 존슨 타워를 건설하자' '한강에 파리의 미각과 같은 존슨 브리지를 만들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러나 국가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재원을 요구하자고 주장했다. 전후 국가 기반건설이 턴키(Turn Key) 사업으로 진행돼 선진국이 기술을 전수하지 않아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두 반대했지만 박 대통령이 고심 끝에 내 제안을 받았고 그 순간 KIST가 생겼다. 박 대통령 업적 중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등을 거론하는데 사실 KIST 설립이 한국 경제개발 초석을 다진 최고 업적이다.”
“건물만 있다고 과학이 발전하지 않는다. 초대 과학기술소장 최영수 박사, 노벨상 후보에 여러 번 오른 이태규 물리학 박사랑 셋이 미국에 가서 명성과 실력이 있는 재미 과학자를 설득했다. 과학기술 특보로서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영어로 대독하며 한국도 과학기술 발전 목표가 있으니 함께하자고 했다. 당시 심포지엄 참석자 중 3분의 1이 귀국해 KIST 초창기 멤버가 됐다. 오늘날 거기서 파생된 연구소가 80개에 이른다.”
◇기술 초강국, 이제 '퍼스트 무버'가 돼야
신 회장은 박정희 정부 초대 경제수석으로서 조선·철강·석유화학·기계·전자 분야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그가 설계한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을 나침반 삼아 한국은 중화학공업 시대를 지나 '기술혁신 중심 산업국가'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조선, 철강,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자동차 등 민간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등 후발주자가 빠르게 추격하고 있고, 최근 자국우선주의와 기술 패권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신 회장은 기술 강국을 넘어 기술 초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패스트 팔로어'로 성장했던 과거 방식을 과감히 탈피해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 반도체, 철강, 화학 모두 남이 하던 것을 빨리 배워 추월한 것일 뿐이다. 한국 산업계는 이 집에서 곰탕이 잘되면 옆에 곰탕집 짓는 멘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 표준이 세계 표준이 돼야 한다. 반도체든 철강이든 모든 분야에서 이런 의식을 갖고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 한국 사람은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데, 이제는 세계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해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 누구도 못한 미래산업 주도해야
1971년 공직에서 물러난 신 회장은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했다. KOMAC은 쇄빙선, 심해 탐사선, 핵폐기물 운반선 등 특수선을 비롯한 2000여종의 선박을 설계·감리해온 세계적 조선 엔지니어링 기업이다. 유조선, 석탄운반선 등은 후발주자 중국이 만들게 하고 KOMAC은 가스운반선과 같이 첨단기술을 요구하는 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하고 있다.
신 회장은 현재 세계 최고 CCUS 기술기업 노르웨이 카본(Kabon)의 공동대표 겸 카본코리아의 회장을 맡고 있다. 91세 현역 엔지니어로서 마지막 소임으로 CCUS 시장 개척을 꼽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미래 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인류가 망하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20ppm이 됐는데 IPCC 보고서에 따르면 450ppm에 인류가 멸종한다. 매년 3~5ppm 늘어나고 있어 골든타임이 20년 정도 남았다. 한국은 연간 7억톤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세계 7위 지구온난화 범죄 국가다. 코로나19 팬데믹, 민생도 중요하지만 현시점에서 인류멸망을 초래할 기후변화보다 중요한 이슈는 없다. 한국은 CCUS에서 만큼은 퍼스트 무버가 돼야만 한다.”
○신동식 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은…
신동식 회장은 1932년생으로 '한국 조선(造船)산업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 나이 91세에 KOMAC 회장 겸 카본코리아 회장을 맡아 국내외 산업현장을 누비며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했고, 스웨덴 찰머스 공과대학원, 영국 더럼 공과대학원에서 조선공학을 수학했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 로이드선급협회 검사관 지냈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초대 경제수석비서관,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총장(장관급) 3가지 직책을 동시 역임했다. 1960년대 '한국과학민주사회 미래상(The Vision of Korean Techno-Cracy)'을 제시하고 국가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국가건설기획자'라는 수식어와 함께 한국이 과학기술 중심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양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고, 엔지니어링 수출공로로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극지탐사와 해양자원개발, 해양주권 강화에 기여해 3·1문화상을 받았고, 외국인 투자유치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1960~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신 회장에게 인도·가나·튀니지·태국 등 세계 여러 나라 국가지도자들이 조언을 요청하고 있다.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미래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노르웨이·미국·캐나다·독일·영국·스웨덴의 주요 인사들과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준희기자 jhlee@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