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8일 예상 밖의 소식이 미국에서 들려왔다. 미국 상원에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이 통과됐다는 소식이다. 하원을 거쳐 8일 만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 공포됐다. 전광석화 같은 군사작전처럼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 기업과 정부에 미치는 충격이 컸다. 특히 출범 후 한미동맹 강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윤석열 정부엔 어찌 보면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형국이었다.
정부는 최대한 발 빠르게 대처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미국 고위 인사를 연이어 만나고,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가 주한네덜란드 대사와 긴급 오찬 시간을 잡았다.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국회에서도 정진석 부의장을 필두로 여야 방미단이 꾸려져 미국 의회 인사와 접촉, 우려와 개정을 촉구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대응했다.
필자도 미국 의회 초청으로 이뤄진 대중국 의회연합체(Inter-Parliamentary Alliance on China, IPAC) 콘퍼런스 일정을 조정해 상하원은 물론 국무부와 주요 싱크탱크 등 워싱턴의 조야 인사를 만나 법안의 부당성과 외교적 여파에 관해 설명하고 우려를 전달했다. 문득 든 생각은 여론 비판과 일치했다. '미국 현지 공관과 본국 본부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은 뭘 하고 있었는가. 대한민국 국익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의회와 정부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대처는 왜 없었는가. 발전된 국력과 국가적 위신에 맞는 역할을 외교부가 하고 있는가.' 이런 비판은 외교부가 처한 현실을 알아보면서 우리가 물리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기회에 정부가 현지 외교관에게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치열하게 외교 활동을 하도록 업무 조건과 분위기, 인적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는지 다시 자문해 봐야 한다. 인력 확충은 보수·진보진영을 떠나 모든 정부에서 외교부의 숙원 사업이었다. 2006년에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출국하면서 한 국회 연설에서 '외교 역량의 물리적인 역부족'을 고백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 유명환 장관은 물론 문재인 정부의 강경화 장관 또한 임명장을 받은 후 첫 일성으로 외교부의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확충을 요청했을 정도다. 외교부 수장은 계속해서 인력의 물리적인 부족을 호소했다.
일각에서는 부처 몸집을 키우려는 욕심이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외교라는 전장에서 함께 맞서는 다른 국가를 보면 이러한 비판은 좀 지나치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다. 그럼에도 세계무대에서 국익을 지킬 전사인 외교관 수는 타 국가와 비교해 턱없이 모자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7만6000명, 일본 외무성은 6500명의 직원을 각각 두고 있다. 영국·독일·인도·프랑스·캐나다도 모두 1만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국익 외교 활동을 한다. 우리보다 GDP 순위가 낮은 브라질과 호주도 우리보다 훨씬 많은 외교관을 두고 있다. 그나마 이탈리아가 3100명으로 직원수가 가장 적지만 그조차도 우리보다 600명이 많다.
외교 역량의 물리적 부족은 필연적으로 외교관 개인 역량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2006년과 2022년 16년 동안 대한민국 명목 GDP는 1052억달러에서 1823억달러로 거의 두 배 가까운 성장을 했다. 같은 기간 외교부 직원은 1900명에서 2500명으로 약 30% 증원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지켜야 하는 국익 규모는 커지는데 지킬 사람은 늘려 주지 않고 대신 결과는 내라고 하는 것은 비논리적이 아닐까. 특히 수출 중심 경제구조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익을 현재와 같은 엄혹한 국제정세 아래 지켜야 하는 현 상황에서는 더더욱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비판은 우리 외교관의 정보수집력에 대한 것이다. 이는 지난 정권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필자 경험을 통해 예를 들어 골프외교로 설명해 보겠다. 타국 주재 외교관은 정보 수집 및 네트워크 수립 업무 일환으로 주재국의 정치인과 식사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주말이면 그들 지역구라도 따라 내려가서 골프를 쳐야 한다. 내가 근무하던 영국에서도 골프를 통해 많은 정보가 오가며 로비가 진행됐고, 지금도 그렇다. 필자도 런던 뉴몰든 지역에서 골프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던 한국인 프로 골퍼에게서 몰래 골프를 배우다가 당시 연합뉴스 런던 특파원이 특종 뉴스로 보도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남조선 사람한테 골프를 배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김정일 지적에 이용호 북한 대사가 영국에서 고급 정부를 얻으려면 할 수 없이 골프라도 쳐야 한다고 변명하니 김정일도 그에 대해서 긍정해 겨우 고비를 넘겼다. 본인이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있던 1998년 당시 남북한 대사가 모두 손씨라는 성(남한 대사는 손명현, 북한 대사는 손무신)을 가졌었다. 주말이면 스웨덴 고위층 비서가 성씨를 헛갈려 북한 대사관으로 골프 약속을 확인하는 전화가 자주 왔는데 그때 북한 외교관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스웨덴 고위층과 골프 외교를 하는 손명현 남한 대사 열정에 탄복하곤 했다. 아마 그때 손명현 대사도 사비가 아니라 대사관의 골프 회원권으로 골프 외교를 벌렸을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2020년 4월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알아보니 2018년 4월 문재인 정부 외교부가 재외공관이 보유한 골프장 회원권을 모두 정리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외교부는 특단 조치의 이유에 대해 “골프를 특권층 스포츠라고 보는 일부의 국민 정서를 감안했다”면서 “외교관 골프와 관련해 국회 등에서 문제를 제기해 왔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했다.
물론 국내에서는 공무원이 평일 근무 시간에 골프 같은 운동을 해선 안 되지만 외교 업무의 기본은 국익에 필요한 고급정보를 알아내고 사전에 필요한 로비 활동을 하면서 국익을 지키는 것이다. 사망한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라운딩 도중에 넘어지는 이른바 '굴욕샷'을 남기면서도 재임 기간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여러 번 골프 라운드 회동을 왜 가졌겠는가. 물론 현지 외교관이 주재국 고위층과 반드시 골프 외교를 해야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수한 외교인력을 현지에 더 많이 보충해서 미국 사회의 곳곳으로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외교는 대책을 미리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과연 외교관에게 자부심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업무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는지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이 기회에 외교부 본부와 주미 외교인력의 전반적인 업무 환경을 다시금 들여다보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외교라는 전쟁터엔 소수정예란 없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된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onekorea2025@gmail.com
평남 평양 출신으로, 서울 강남구갑 국민의힘 소속 21대 국회의원이다. 북한 외교관으로서 우리나라에 귀순한 뒤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중국 베이징외대 영문과 출신이며, 덴마크·스웨덴·벨기에 등 유럽 지역 중심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2016년 탈북 이전에는 주영 북한 공사로 활동하며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서열 2위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귀순 이후에는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특임전략자문위원, 문재인 정부 통일부 국제안보행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1대 국회에서는 외교안보특별위원회 소속으로서 주영 북한 공사로 있으면서 축적한 전문성을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