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3)디지털시대, '먹는 행위'의 의미

[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3)디지털시대, '먹는 행위'의 의미

살아있는 동식물의 무덤은 어디인가. 인간의 입이다. 에덴동산의 비극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생명을 이어 간다. 오직 동물만이 살아있는 개체를 죽여서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은 뭘까. 인간의 생존과 번식이 목표일 수 없다.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다른 생명체를 죽여서 연료로 삼는 인간을 택했을까. 인간의 몸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입에서 항문까지 연결된 긴 소화기관을 살과 뼈가 둘러싸고 있다. 그 좁은 골목길에서 입, 식도, 위, 소장, 대장을 거치면서 소화의 대장정이 이뤄진다.

우리는 왜 동식물을 먹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걸까. 먹는 행위의 성격은 에너지 변환이다. 동식물을 잘게 쪼개어 분해와 결합을 거듭해서 에너지를 생성하고 변화를 가져온다. 에너지 변환의 끝은 어디일까. 태양계에서 생명체가 확인된 곳은 지구가 유일하고,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을 것이다.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온도, 대기 등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우주는 생명체를 통해 에너지를 얻고, 궁극은 더 이상 변화가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우주가 생명체로 가득했다가 점차 소멸해 오늘날 우주가 됐을지 모르겠다. 드넓은 우주에 지구만이 마지막 생명체를 붙들고 있는 행성일 수 있다.

빈곤사회에선 굶지 않아야 살아남았다. 그것이 권력자의 역할이고, 남보다 많이 먹으면 탐욕이었다. 제사를 지낼 땐 많은 음식을 올려 후손이 잘살고 있다고 알렸다. 자유가 아니면 빵을 달라. 잘 먹는 자와 못 먹는 자의 계급화는 반역 또는 혁명의 빌미가 됐다. 풍요사회에선 먹는 행위가 더 이상 생존 문제가 아니다. 건강하고 즐겁게 먹을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고령화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방법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많이 먹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타인이 먹는 것을 보고 만족을 얻는다. '먹방'이 존재하는 이유다. 적게 먹지만 영양을 갖춘 먹방도 인기다. 채식주의는 도덕적이거나 건강하다고 평가된다. 신선한 재료를 찾고 음식을 만들어서 제공하고, 먹는 행위와 그 장소를 어떻게 보여 줄지가 작품이 된다. 먹는 행위의 언어적 위상은 소유 개념으로 확대된다. 멋진 이성을 사귀는 행위, 재산을 취득하는 행위, 명예롭거나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먹는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생존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을 먹는다고 했다.

디지털 공간에서 먹는 행위가 '보는 행위'가 된 배경에는 거대한 식음료 공급 시장이 있다.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1인 가구 증가, 다이어트 유행, 정보통신 발전으로 먹는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먹는 행위는 인간의 원죄이긴 하지만 생존과 번식을 위해 불가피하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욕망하지 않는 생명체는 에너지를 얻지 못해 멸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식당이 많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외세 침략과 농경사회의 궁핍했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그 많은 식당이 생존하려면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 식사를 네끼, 다섯끼를 먹는 것으로 법을 바꿔야 하진 않을까. 자본주의의 예리한 눈빛은 식당과 식음료시장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많은 기업이 인간의 식욕을 노리고 떠받히고 있다.

살기 위해 먹는 시대는 지났다. 즐기기 위해 먹는 시대다. 즐기다 보면 비만에다 질병을 달고 살게 된다. 탄소 배출을 말하지 않더라도 다른 동식물의 사체에서 에너지를 찾는 것은 뿌리 깊은 원죄다. 먹는 행위를 함에 좋은 사람과 멋진 장소도 중요하다. 디지털 화면과 대화하며 먹는 행위도 자신과의 소통이다. 폭식과 소식을 넘어 자신과 가족, 동료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돼야 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