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1986년에 쓴 '위험사회'에서 일반적인 위험(danger)과 사람이 초래하는 위험(risk)를 구분하고 현대 산업사회 특징을 위험사회(risk society)로 진단했다. 자연보다 사람이 초래하는 위험이 중대하고 일상화된 사회라는 뜻이다. 과거 위험은 태풍, 홍수 등 자연재해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현대 위험은 과학기술과 정치·경제·사회 문제가 결합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인위적인 위험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정보통신으로 연결된다. 일상화된 위험은 불안을 낳고, 온라인으로 전파된다. 국경을 넘나들며, 전염성이 강하고, 빈부와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의학 발전에 따른 고령화는 거동이 불편한 노령층의 생활 위험도 높인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해지고, 여가 생활이 증가하면서 각종 생활 공간에서 위험이 생긴다. 안전의 가치가 평등보다 중요해진다. 안전은 물이나 전기처럼 공적 소비재가 된다.
원시시대 인간의 안전을 위협한 것은 자연재해와 짐승, 그리고 또 다른 인간 무리였다. 인간은 강에서 생선을 잡거나 나무 열매를 채집하는 등 손으로 물건을 집기 시작하면서 직립 보행을 시작했다. 표범처럼 빠르고 날렵하기를 포기했고, 악어처럼 단단한 이빨과 근육을 포기했다. 강한 육체 대신 두뇌를 키웠다. 도구·무기를 만들어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불을 이용해 음식을 덥히고 적을 쫓았다. 인간이 만든 도구와 기계는 편리함을 주지만 피해도 낳을 수 있다. 불을 잘못 다루면 화상을 입는다. 자동차는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원자력발전소가 재해 등에 무너지면 인명 피해를 부른다. 핵 등 군사 무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춘 과학기술만 남아 문명을 이루었다. 위험은 인간이나 공동체 외부에 있었고, 그것이 위험에 해당하는지와 규모·해악을 판단할 수 있었다. 통제를 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의 위험은 다르다.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이 맡긴 일을 하지만 오류가 생기면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 위험이 외부에 있지 않다. 위험은 과학기술 자체에 내재해 있거나 인간 또는 공동체 내부에 있고, 내외부에 겹쳐 있는 경우도 많아 다루기 어렵다. 위험은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감수해야 할 과정이 됐다. 위험은 임박해서 명확해지기 전엔 알기 어렵다. 당연히 위험의 내용과 피해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위험이 현실화하면 통제가 어려운 이유다.
과학기술이 가져오는 혜택은 부유층에 쌓이고 위험은 빈곤층에 전가되는 것도 문제다. 위험이 예상되거나 발생하면 중요한 정치 의제에서 제외하기 위해 노력하고, 전문가 등 소수의 엘리트로 논의의 장을 채운다. 위험에 관한 논의에 빈곤층이 배제되면서 사회 갈등으로 번진다. 소득의 재분배보다 위험의 재분배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선진국과 대기업은 위험에서도 사업 기회를 발견한다. 그린산업, ESG 같은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고도화된 디지털시대엔 부유층도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부메랑효과가 그것이다. 코로나19 등 바이러스는 부유층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전쟁, 기후 온난화의 위험도 마찬가지다. 공인된 위험도 주의해야 한다. 원자력발전, 자율주행, 인공지능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수용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공인된 위험 영역으로 들어온다. 위험이 공인되면 위험 의식이 약화한다. 위험을 없애자고 과학기술을 없애면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을 없애는 모순을 낳는다.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위험진단과 안전시스템이 중요하다. 일상 생활 속 위험을 통제하고 안전을 높일 수 있는 상생의 거버넌스를 모색해야 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