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돌파 능력'과 '안정적인 조직 운영'.
재계가 꼽은 올해 인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위축과 원자재값 인상, 고환율 등으로 내년 경영 환경이 더욱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역대급 복합위기를 헤쳐 나가면서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함과 동시에 쇄신할 수 있는 인물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르면 이번주 4대 그룹 중 가장 먼저 인사를 시작하는 LG그룹은 올해 '안정'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구광모 회장이 지난해 회장 취임 뒤 가장 큰 폭의 임원인사를 단행하며 사장단에 변화를 줬던만큼 현 경영진을 믿고 1년 더 맡길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 4인 부회장 체제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신상필벌 원칙에 입각해 위기 상황에서도 좋은 실적을 낸 정철동 LG이노텍 사장의 부회장 승진이 점쳐진다. 수요감소 직격탄으로 부진한 실적을 거둔 LG생활건강 차석용 부회장의 유임 여부가 주목된다. LG생활건강은 차 부회장이 2005년 대표를 맡은 뒤 매년 성장세를 이어왔으나 올해 실적은 악화됐다.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부회장,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권봉석 LG 부회장은 유임 가능성이 크다. 권영수 부회장이 지난해 대표이사를 맡은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상승세다. 신 부회장의 LG화학도 불황 속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다. 지난해 승진하며 COO를 맡은 권봉석 부회장도 역할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전자 계열사인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실적 부진으로 쇄신책을 마련할 것이라는 전망이 안팎으로 흘러나온다. 수요감소 영향으로 TV사업은 부진했지만 전장사업을 9년 만에 흑자로 만든 만큼 조주완 대표이사 사장 체제는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실적에 따라 부사장급 이하 임원 인사는 변동 폭이 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LG디스플레이는 전반적인 쇄신과 조직개편 전망이 우세하다.
통상 12월 초에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 인사를 단행한 삼성은 올해도 비슷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는 이재용 회장이 취임한 이후 처음 실시하는 정기 인사라는 점에서 이목이 쏠린다. 조직 혁신과 안정을 동시에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중용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핵심 사업부 수장 인사 폭은 최소화해 조직 안정을 추구하면서 차기 CEO 후보를 발탁하는 인사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작년에 3개 사업 부문의 60대 대표이사를 모두 교체하고, 사업 부문을 반도체와 세트 두 부문으로 통합하는 조직개편을 통해 50대인 한종희 부회장과 경계현 사장 '투톱' 체제를 구축했다. 그룹 안팎에서는 투톱 체제가 1년 밖에 되지 않아 작년처럼 큰 틀의 변화를 꾀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본다.
변수는 올해 스마트폰, 냉장고에서 불거진 품질·성능 논란과 3분기 실적 둔화다. 최근 이재승 생활가전사업부 사장이 자진 사임함에 따라 후임 인선도 필요하다.
이재용 회장 승진에 따라 그룹 컨트롤타워가 부활할지 관심을 모은다. 재계는 삼성이라는 거대기업이 시대와 기술 변화에 앞서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할 컨트롤타워 구축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현호 부회장(사업지원TF)이 이재용 회장의 '뉴삼성' 그림을 정밀하게 그릴 수 있는 인물로 주목받는다. 전 경영지원실장이었던 최윤호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이 삼성전자로 돌아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박학규 현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사장과 역할이 어떻게 조정될지도 관심사다. 부사장급 이하 인사에서는 올해부터 직급별 체류 연한 폐지를 통한 조기 승진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인사제도를 시행하고 있어 30~40대 젊은 리더 발탁 가능성이 높다.
SK그룹은 최고경영자(CEO) 대부분을 유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외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만큼,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올해 SK그룹 관계사 및 계열사 실적이 좋았던 점도 한 이유다. 대표적으로 투자형 지주사인 SK는 올해 10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대비 100% 넘게 증가한 것이다. 주요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은 6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이 기대된다.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경영진은 장동현 SK 부회장과 최창원 SK가스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 박상규 SK네트웍스 사장, 김철 SK케미칼 사장 등이다. SK그룹은 각사 이사회가 CEO를 평가하고 유임 여부를 결정한다. 통상 12월 첫째주나 둘째주 목요일에 발표한다. 이에 따라 내달 1일 또는 8일에 사장단 인사가 예상된다.
SK그룹 관계자는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면서 “현재 대내외 경영 환경이 전시 상황과 준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대다수 CEO가 유임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차그룹의 연말 임원 인사는 국내 주요 대기업 가운데 가장 늦은 편이다. 통상 12월 중순께 시행됐다. 올해는 대내외 급변하는 경영환경 대응과 지속 가능한 미래 모빌리티 사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인사들의 전진 배치가 주목된다.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인 203명 신규 임원을 선임한 만큼 올해는 작년보다 인사 폭이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인사에서는 인포테인먼트와 전기차, 정보통신기술(ICT),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과 신규 사업 분야의 승진 배치가 이뤄졌다. 아울러 가신 그룹으로 불리던 주요 임원들이 대다수 물러나며 정의선 회장 직할 체제로 세대교체를 마무리했다.
올해도 로보틱스와 미래항공모빌리티(AAM), 자율주행, 전동화 등 현대차그룹이 추진 중인 미래 신사업을 주도할 인사들의 승진이 예상된다. 작년 인사에서는 신규 임원 3분의 1을 40대가 차지할 만큼 과감한 발탁 인사가 이뤄졌다. 재계 일각에서는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과 고금리 등 대내외 경영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인사 시점을 앞당길 것이란 관측도 제기한다.
함봉균기자 hbkone@etnews.com, 류태웅기자 bigheroryu@etnews.com,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