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69>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공사 착수

“4월부터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공사에 착수합니다.” 1974년 3월 22일.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이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고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에 따라 올해 2억1000여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4월부터 도시건설 공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최형섭 장관은 “도시 하부구조시설을 비롯해 전자전기·기계·해양 등 5개 계열별 연구기관, 공동 이용시설 등에 모두 443억원을 들여서 건설하는 학원도시에 17개 연구소와 이공계 대학 등을 설립한다”면서 “오는 1981년까지 건설을 완공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2월17일 과학기술처를 초도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2월17일 과학기술처를 초도순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정부는 이후 4월부터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가 달린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해 4월 5일. 건설부는 “대덕연구학원도시 도로와 상하수도, 주택 등 도시 하부 건설 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도시건설 공사의 첫 삽이었다. 도시건설 사업은 과학기술처가 주관하지만 도로건설, 주거 조성사업 등 건설 분야는 건설부가 담당했다. 이는 부처 업무 분담에 따른 것이다.

건설부는 첫 사업으로 대덕연구학원도시로 들어가는 탄동로 공사에 착수했다. 도로는 대전시 유성읍(현 유성구 일부)에서 충남대 후문을 지나 신성동과 연결하는 길이었다. 건설부 중부국토건설국(현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이 이 공사를 담당했다. 정부는 그해 6월부터 한국표준연구소와 한국선박연구소가 입주할 대지 건설공사도 시작했다.

야심 차게 시작한 건설공사는 순탄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민원이 잇따랐다. 특히 현지 주민 이주와 묘지 이전을 놓고 강력한 주민 반발에 부닥쳤다. 정부는 문제가 대두할 것에 대비해 사전 대책을 마련한 상태였다. 현지 주민의 재산 손실을 최대한 방지하고 적정 보상과 생활 근거를 최대한 보호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묘지는 공원묘지를 조성해서 이전한다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현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74년 12월 어느 날 아침. 영하의 추위 속에 과학기술처 직원들이 출근해서 하루 업무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장관 비서관이 서정만 종합계획관실 서기관(과장)에게 급히 내려왔다. “서 과장, 1층 민원실로 내려가 보세요” “무슨 일입니까.” “충남 대덕(현 대전시 대덕구)에서 나환자 대표 20여명이 예고도 없이 상경해서 장관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시 학원도시 진입로인 탄동로를 개설하는 4만6000㎡의 땅에는 나환자 11가구가 살고 있었다. 서정만 전 국립중앙과학관장(당시 과학기술처 종합계획관실 서기관)의 회고.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나환자촌 이주 대책과 관련한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듣기 위해 최형섭 장관 면담을 요청했어요. 그 당시 나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들과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였어요. 그들은 주민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집단부락을 형성해 살고 있었어요.”

이들이 사는 지역을 연구소 부지로 포함하는 바람에 이주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지 주민 이주 대책 업무는 충남도와 대덕군 소관이었다. 정부는 그런 업무지침을 해당 기관에 통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도시건설 주관부서인 과학기술처를 찾아온 것이다.

서 과장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 앞에 나섰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 과장은 반가운 벗을 만난 듯 이들의 두 손을 덥석 잡고 일일이 악수를 했다. 서 과장의 이런 행동에 이들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 과장은 이들에게 예의를 갖춰 말했다. “먼 길 오시게 해 송구합니다.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서 과장은 이들을 정부종합청사 19층 과학기술처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들이 자리에 앉자 서 과장은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의 국가적 필요성과 지역주민 이주에 대한 정부 대책을 소상히 설명했다. 과학기술처 직원도 함께 이들을 설득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 노기등등하던 주민 대표들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서 과장은 대안을 마련해 이들과 며칠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에 주민들은 별 소란 없이 조용히 대덕으로 돌아갔다.

서 과장의 증언. “나는 이튿날부터 충남도청과 대덕군청을 오가며 그들의 불만을 해소할 몇 가지 대안 마련에 최선을 다했다. 마련한 대안은 사전에 나환자촌 대표에게 알려주고 이들의 동의를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과 상호 신뢰를 쌓았다. 신뢰를 형성하자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한결 수월했다.”

서 과장은 그들과 약속한 날, 담당 공무원들과 함께 만났다. 정부가 마련한 이주계획을 설명했다. 충남도에서 국고보조금 600만원과 대덕군에서 100만원을 들여 나환자촌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한다는 안이었다. 주민들은 이 방안에 합의했다. 나환자촌 11가구의 이주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서정만 전 국립중앙과학관장은 “그때 정부 이주계획을 순순히 받아준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해가 바뀐 1975년 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과학기술처를 연두순시하고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최형섭 장관은 그 자리에서 “충남 대덕연구학원도시에 입주할 해양개발연구소와 선박연구소 등의 건설에 착수하고 전자전기, 기계, 석유화학 등 5대 전략연구소 건설 준비작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고 보고했다. 최형섭 장관은 “새해 과학기술 정책은 과학기술 기반 구축과 산업기술 개발, 과학기술 풍토 조성에 두고 이를 중점 추진하겠다”면서 “과학두뇌 양성에 힘쓰는 한편 그동안 각 부처에서 산발적으로 관장하던 국가기술자격제를 과학기술처로 일원화하고, 기초연구지원을 위한 과학재단을 설립하며, 국제 기술 협력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해 4월 21일. 제8회 과학의 날 기념식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에서 열렸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기념식 치사를 통해 “중화학 기술 개발을 위해 전자전기, 기계, 선박 등 5대 전략산업 연구기관을 충남 대덕연구학원도시에 설립하는 등 1981년까지 도시 건설을 끝내면 도시는 한국과학기술의 요람이자 한국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며 정부의 변함없는 과학기술 개발 의지를 거듭 밝혔다.

그해 4월 중순 어느 날. 한복에 갓을 쓴 여흥 민씨 문중 대표 10여명이 갑자기 과학기술처를 찾아왔다. 여흥 민씨는 이조 태종비로서 세종 생모인 원경왕후, 숙종비인 인현왕후, 고종비인 명성황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당시 대법원장인 민복기씨도 여흥 민씨였다. 여흥 민씨 문중 대표들이 과학기술처로 달려온 것은 묘지 이전 때문이었다.

서정만 과장은 여흥 민씨 대표들도 극진히 예우하면서 국가계획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도시건설 사업 내용을 소상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여흥 민씨 문중 대표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들은 조상들이 조성한 묘지를 자신들 대(代)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 지역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옛날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대덕으로 연구학원도시를 결정한 후 최형섭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 박사. 대덕은 명당 중 명당이오. 나중에 건설부 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이곳을 돌아보시오.” 그래서인지 명문대가(名門大家) 묘지가 많았다. 그러나 천하 명당이라 해도 국가계획사업으로 공사하고 있는 도시건설 사업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정만 전 국립중앙과학관장의 회고. “일단 전후 사정 얘기를 듣고 충분히 검토한 후 다시 만나서 해결책을 찾기로 약속하고 이들을 돌려보냈다. 며칠간 묘안을 생각하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종중 묘 20기와 사당 이전을 놓고 하나씩 주고받는 절충안을 마련했다. 사당을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하는 대신 묘지를 이전한다는 안이었다.”

서 과장은 이튿날부터 청와대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충남도청, 충남지방국토관리청 등 관계 기관을 뛰어다니며 이런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문중 대표와 이 방안을 협의해 해결책을 찾았다. 여흥 민씨 사당은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변경 고시하고 묘지 20기는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지성이면 감민(感民)이고 풀지 못할 매듭은 없었다. 정부는 도시건설 공사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