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8) 과학기술과 성평등

[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8) 과학기술과 성평등

1958년 37세에 난소암으로 죽은 여자가 있다.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다. 탄소 연구로 유명하며, 바이러스 구조를 최초로 규명했다. 1952년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선명한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추가 연구를 위해 발표를 늦췄다. 동료인 모리스 윌킨스가 그녀의 허락 없이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그 사진을 보여 줬다. 그들은 DNA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이론을 완성했으나 입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엑스레이 사진을 본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1953년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가 죽은 뒤인 1962년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그녀가 조금 더 살았다면 노벨상을 받았을까. 여자라는 이유로 공로를 뺏긴 것은 아닐까. 동료인 윌킨스와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달랐을까. 모든 것은 의문으로 남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성별을 이유로 차별할 수 없다. 헌법이 그렇게 말한다. 유엔은 여성이 정치, 경제, 행정 등 주요 의사결정 참여 정도를 점수로 환산한다. 국가별로 교육수준, 국민소득, 평균수명 등에서 남녀평등을 측정·발표한다. 우리도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했고 남녀고용평등법 등을 제정했다. 정부 위원회, 공공기관 임직원, 기업 사외이사 등 임직원 채용에 여성 비율을 고려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장관 임명에 여성 비율을 고민한다. 그런데 구색 갖추기에 그치면 여성 인권이 개선되지 않으면서 남성에게 박탈감을 준다. 한창 일할 나이에 국방의 의무를 다했는데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경제성장이 정체되면서 젊은 남성 중심으로 불만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근대 철학이 이성·과학을 중시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로 남성을 내세우고 여성은 남성을 보조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여성은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남성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한다. 남성은 여성을 이용한다. 남성과 대결할 힘이 없는 상류층 여성은 남성과 결탁하고, 남녀평등은 그녀들 지위를 보전하는 형식적 구호에 그친다. 힘없는 여성은 남성은 물론 여성 지식층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사회 참여 기회를 놓치고 가부장제에서 위험한 삶을 지탱한다.

디지털시대엔 어떨까. 물리력보다 아이디어, 기술이 중요하다. 로켓 발사를 위해 무거운 로켓을 옮길 필요가 없다. 재난 현장에 건장한 사람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로봇이 들어갈 수 있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 회사나 공장에서 밤을 새워 일할 필요도 없다.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비대면 시대다. 세상의 아이디어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그 절반이 여성이다. 여성이 좋은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게 하려면 남녀평등 교육 환경이 중요하다.

정말 그럴까. 남녀 숫자와 균형을 억지로 맞추는 교육은 오히려 불평등을 조장한다. 교육의 형식화를 가져오고, 실질적 효과를 보기 어렵다. 성별 간 갈등, 대결 구도로 접근하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남녀 성별이 아니라 과학기술인의 도덕과 실력이다. 남녀를 구분하지 말고, 억지 균형을 버리고 자질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에서 얻은 지혜를 정부, 공공기관, 기업, 비영리기관에서 쓸 수 있어야 한다. 능력 없는 여성들이 학력·혈연을 바탕으로 구색 맞추기용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리에 두지만 말고 진짜 역할을 맡겨야 한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나와야 한다. 결국엔 능력 있는 여성이 그 자리에 간다. 그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다. 남성의 보조자로 두는 것은 낭비다. 미래를 늦추는 죄악이다. 남녀 모두 디지털시대를 맞는 동등한 주체로서 공존이 중요하다. 남성·여성, 나아가 제3의 성인지를 불문하고 존중하면 밝은 디지털 미래가 온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