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72>박 대통령의 대덕연구단지 마지막 시찰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오른쪽)과 서정만 대덕단지관리사무소장이 1979년 대덕단지관리사무소 현판식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오른쪽)과 서정만 대덕단지관리사무소장이 1979년 대덕단지관리사무소 현판식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개천절인 1976년 10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과학입국 기술자립'이란 친필 휘호를 과학기술처에 내려보냈다. 이 휘호는 '과학기술 입국'을 향한 박 대통령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글귀였다. 박 대통령은 기회 닿을 때마다 “과학기술이 곧 국력이며, 미래 국가 발전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이튿날인 10월 4일.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 본회의에 참석, 1977년도 예산안 관련 시정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에서 과학기술 육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전자, 기계, 조선 등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과학기술 혁신으로 제품 국산화를 통해 수입 대체를 하겠다”면서 “전자공업 분야는 소재·부품을 개발하고 첨단 기술개발을 통해 전자공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 “농어촌 전화사업을 계속 추진해서 전화 25만6000회선을 증설하고, 3000여곳에 새마을 통신시설을 신설하겠다”면서 “현재 건설되고 있는 대덕연구단지에 전자통신연구소, 기계금속연구소, 화학연구소 등을 설립하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덕연구단지 기반 공사와 연구소 설립 등은 속도를 냈다. 공공과 민간 연구기관도 입주를 서둘렀다. 단지에서 가장 먼저 공사를 시작한 연구소는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다. 국가표준기관으로 1975년에 설립된 한국표준연구소는 설립자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초대 소장은 대한민국 1호 유치과학자로서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김재관 박사였다. 그는 포항제철 설립과 조선·자동차 사업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연구소는 1976년 9월 23일 대덕연구학원도시 내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본격 들어갔다. 연구소 지번 주소는 유성구 도룡동 1번지였다. 주소와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당시 연구소 등기를 담당한 직원이 등기 주소를 고민하다 설립자인 박 대통령 주소가 종로구 세종로 1번지인 점에 착안했다. 그는 이왕이면 도룡동 1번지가 좋겠다는 생각에 김재관 소장에게 결재를 올렸다. 이를 본 김 소장은 “좋은 생각”이라며 승락, 1번지를 택했다.

이 무렵 정부조직법 일부개정으로 과학기술처가 과학자원부로 명칭이 바뀔 뻔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제1차 석유파동으로 자원 문제가 국가 우선 해결 과제였다.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인 확보는 정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를 해결할 대안 가운데 유력안이 에너지 관련 부서와 과학기술처를 통합해서 가칭 '과학자원부'를 신설하자는 의견이었다.

총무처 중심으로 관계 부처 실무자 간 논의를 거쳐 과학자원부 신설 방안을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키로 방침을 정했다. 이 같은 방침에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반대하고 나섰다. 권원기 전 과학기술처 차관의 증언. “최 장관은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행정 영역이므로 에너지 부서와 통합한다면 과학기술의 종합성을 훼손할 수 있고, 과학기술의 지속적 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반대했다.”

최 장관의 반대로 과학자원부 신설안은 폐지됐다. 그 대신 상공부의 에너지 관계 부서인 전기국과 공무국, 과학기술처의 자원개발관실, 공업진흥청의 열관리과 광업등록사무소 등을 통합해 동력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를 신설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일부개정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국회 본회의를 거쳐 1977년 12월 16일 대통령령 8771호로 공포, 시행됐다.

1978년 4월 7일. 한국표준연구소는 이날 새 청사에서 연구소 가운데 가장 먼저 업무를 시작했다. 대덕 1호 입주 연구기관이 된 것이다. 당시 표준연구소는 미국·독일·프랑스 등에서 해외 과학자 18명을 유치, 위상을 세웠다. 그해 9월 2일. 민간 연구소 가운데에서는 럭키중앙연구소(현 LG화학기술연구원)가 대덕연구단지에서 가장 먼저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갔다. 럭키는 이 연구소 착공에 앞서 15명의 박사 포함 100여명의 연구원을 확보했고, 1983년까지 총 250명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해 12월 8일. 럭키중앙연구소가 이날 개소식을 가졌다. 민간연구소 1호 입주 기관이었다.

대덕연구단지 건설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각별했다. 수시로 연구단지를 찾아 현황을 보고받았다. 그해 4월 19일. 박 대통령은 이날 낮 대덕연구단지를 시찰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단지 본부에서 연구소 운영현황과 연구활동 상황을 보고받고 2시간여 한국표준연구소 등 연구소와 단지 시설물을 둘러보았다. 박 대통령은 연구원들에게 다과를 베풀고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1979년 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북도청을 순시한 후 대덕전문연구단지에 들러 단지 건설과 운영현황을 보고받았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 한국표준연구소장의 안내로 연구소 내 표준시간·주파수·길이·온도·질량 연구실을 차례로 둘러보고 연구내용을 확인했다. 박 대통령은 표준시간 연구실에서 3000년에 1초만 틀린다는 원자시계에 자신이 찬 손목시계의 시간을 맞추기도 했다.

그해 3월 10일. 과학기술처는 폭증하는 대덕연구단지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고 종합 관리를 위해 과학기술처 장관 소속으로 대덕단지관리사무소를 설치하는 내용의 과학기술처 직제를 대통령령 제9376호로 개정, 공포했다. 대덕단지관리사무소는 단지 건설 기본계획 수립과 종합 조정, 토지 이용 조정과 주거지역 개발과 도로망 및 용수 공급 계획, 주민대책과 민원사항 처리 등이 주 업무였다. 초대 소장에 서정만 과학기술처 부이사관을 임명했다. 그는 대덕연구단지 업무를 담당한 실무 과장이었다. 서정만 당시 소장의 회고. “나는 소장 임명장을 받고 사무실과 직원 등을 준비하지 못한 채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에 쫓겨 직원 한 명만 데리고 이튿날 아침 대덕 현지로 내려갔다. 먼저 입주한 한국표준연구소 김재관 소장의 협조로 임시 사무소를 개설했다.”(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대덕단지관리사무소는 그해 5월 10일 사무실을 마련해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현판식에는 최종완 과학기술처 장관, 손수익 충남도지사, 김재관 한국표준연구소장 등이 참석했다. 서 소장은 현판식이 끝나자 가장 먼저 종합상황실을 마련하고 박 대통령 친필 휘호인 '과학입국 기술자립'을 중앙에 걸었다.

그해 10월 25일 오후 1시 20분경.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쏜살같이 대덕연구단지 관리사무소 정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이를 창문으로 바라본 서 소장은 '저 차가 대통령이 탄 승용차가 틀림없다'고 직감했다. 서 소장이 급히 브리핑을 준비하려는 순간 상황실 문이 열렸다. 박 대통령이 앞장서서 들어오고 경호실장과 비서실장이 뒤따라 들어섰다. 박 대통령은 경호원도 없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두 사람만 데리고 관리사무소를 불시에 찾은 것이다. 상황실에는 박 대통령을 포함해 서 소장까지 모두 4명뿐이었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박 대통령은 서 소장과 악수한 후 자리에 앉지도 않고 대형 조감도 앞으로 가서 선 채로 입주 연구소와 단지 건설 상황을 확인했다. 이어 과학기술자 주택과 자녀 교육문제, 초등학교 개설, 과학자들의 후생복지 시설 계획 등을 소상하게 물었다.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서 소장에게 지시했다. “연구원들이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문제를 해결하시오.”

서정만 당시 소장의 증언. “당시 현직 대통령이 경호원도 없이 사무소를 깜짝 방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날 대통령은 연구소에 대한 깊은 배려가 엿보이는 자상한 모습이었다. 대통령이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평소 엄격하던 이미지와는 달리 대덕연구단지 완공을 향한 그의 집념과 연구원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연구단지 시찰이 생전의 박 대통령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튿날인 10월 26일 밤 서울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탕, 탕, 탕” 울렸다. 역사의 변곡점이 된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총성은 박정희 시대를 마감하는 신호탄이었다. 박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인 '과학한국 기술자립'의 힘찬 발걸음도 일단 멈췄다. 혼돈 시대가 다가왔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