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온라인 플랫폼. 디지털 경제 관련 소식이 연일 넘쳐나는 시대다.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통상(通商)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통상 시대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디지털 통상은 디지털화된 상거래에 관한 것이다. 디지털화된 상거래는 아마존·알리바바와 같이 상품의 디지털화된 국제적 거래 방식인 전자상거래, 핀테크·에듀테크와 같이 서비스 거래를 디지털화한 디지털 서비스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데이터가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상거래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하려는 제도적 노력을 '통상'이라고 정의할 때 '디지털 통상'이란 어떻게 데이터가 국제적으로 원활하게 이동하면서도 개인정보나 국가안보와 같은 민감한 정보가 무분별하게 해외에 유출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할 것인가로 정리할 수 있다.
요컨대 국경 간 이동 대상이 자동차나 식품에서 데이터, 통제 목적이 소비자 안전이나 위생에서 개인정보로 각각 바뀐 것이다.
디지털 통상에 대한 국제규범은 1998년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에서 '전자상거래 작업 계획' 채택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요국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에서 구체화되고 확산되다가 최근에는 디지털통상 이슈에만 특화된 양자 간 또는 복수국 간 협정(treaty)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내용 측면에서도 초기에는 종이 없는 무역이나 전자상거래 등에 국한되던 것이 AI, 빅데이터, 클라우드컴퓨팅 등으로 규범화 대상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통상 차원에서 디지털전환은 깊이 측면에서는 아직까지 초보 단계로 평가할 수 있지만 최근 디지털전환 속도와 범위를 고려하면 '제4차 개항기'라 할 정도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제통상규범의 근본적 변화는 항상 국가 간 첨단기술에 대한 경쟁과 정치적 패권경쟁과 맞물려 통상질서가 재편되는 과정 또는 그 결과로 진행됐다. 19세기 말 제1차 개항기는 증기기관에 기반한 기계화와 서양 제국 간 식민지 쟁탈이 그들만의 이른바 '만국공법' 논리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우리나라는 일방적 수탈 대상이었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제2차 개항기는 전기에너지 기반의 대량생산으로 가능해진 상품무역을 자유진영 국가 간에 확대하기 위해 설계된 이른바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체제였다. 우리는 체제 성립 20년 뒤 후발로 참여한 개발도상국이었다. 제3차 개항기는 동구권 몰락 이후 본격화된 글로벌 경제와 정보기술(IT) 기반 지식정보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상품무역을 넘어 투자·서비스·지식재산권 등으로 규범화 범위가 폭발적 확장을 이루었다. 한국은 설립 멤버로 가입했고, 선발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바야흐로 디지털혁명과 미-중 패권경쟁 시대다. WTO 체제에 대한 회의도 팽배하다. 상품과 서비스 중심 물질경제 영토를 넘어 데이터 중심 디지털경제 영토가 새로 전개되면서 글로벌통상질서 재편이, 제4차 개항기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 이제 한국은 경제·기술·문화 등 모든 면에서 번듯한 선진국으로서, '룰 메이커'로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관점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예를 들어 현재 대한민국이 품은 디지털플랫폼정부 비전을 자국 중심의 '세계 최고 디지털정부'에서 시작하되 글로벌 차원의 디지털통상규범을 선도해 가는 '디지털플랫폼국가'로 전환·확장할 필요가 있다. 상품과 서비스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거래되는 장으로서의 비전이 과거 우리 '통상허브국가론'이었다면 여기에 데이터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연결되는 장으로서의 비전은 '디지털통상플랫폼국가'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제조업 선진국 시각에서 데이터가 중간재라는 시각으로 데이터 중심 글로벌공급망 현황을 점검하고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K-콘텐츠를 통한 부가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디지털콘텐츠 보호라는 요소를 새로운 국제통상규범에 효과적으로 안착시킬 수 있는 중장기 전략이 마련돼야 한다. 이와 함께 공공데이터 활용과 민간데이터 거래가 안전하고 활력 있게 확대될 수 있도록 관계자에 대한 교육 실질화와 인센티브 설계 현실화가 필요하다. 유인없이 중요성만 강조된 목표 제시로는 '터'는 만들 수 있더라도 북적대는 '장'이 서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정민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 jsuh@s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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