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에서는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활동이 이뤄진다. 피자 배달로 근근이 삶을 이어 가는 사람도 가상세계에선 뛰어난 해커와 검객이 될 수 있다.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 사람이다. 소설 속 가상세계의 이름은 메타버스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소설은 현실로 다가왔다.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 실감 기술과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비대면 사회가 메타버스를 선보였다. 머리에 장착해서 입체화면을 표시하고 로봇을 제어하는 장치, 3차원(3D) 입체공간을 만드는 3D매핑·모델링, 시청각 인터페이스가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고 있다. 메타버스는 현실을 대체할까 아니면 보완에 그칠까. 생각을 달리하자. 대한민국의 디지털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
2000년에 등장한 세컨드 라이프는 실패했다. 이유가 뭘까. 미흡한 기술, 음란물만 탓하기엔 뭔가 미흡하다. 현실과 메타버스 관계에 답이 있다. 가상공간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영화 '매트릭스'를 보자. 인간은 기계 세상을 유지하는 건전지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에 살지 지하 동굴 '시온'에 살지 선택권이 없다. 매트릭스의 삶은 강제된 삶이다. 선택된 소수만 빨간 약을 선택해 빠져나올 기회를 얻는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선 부익부 빈익빈 갈등 속에서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상공간 오아시스를 찾는다. 일종의 마약이다. 영화 '트루먼 쇼'는 어떤가. 작은 섬에서 행복을 즐기는 주인공 트루먼의 이야기다. 모든 것이 쇼라고 외치며 떠난 연인을 찾아 피지섬으로 가기 위한 여정을 그린다. 그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왜일까. 트루먼은 태어나면서 TV 프로그램에 갇혀 모든 삶이 방송되는 존재다. 가상세계의 삶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스튜디오 세트장 벽과 맞닥뜨린다. 고민 끝에 벽에 난 계단과 문을 통해 현실로 나온다. 감독은 트루먼에게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가라 외치고 관객은 탈출하라고 외친다. 우리는 메타버스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우리가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메타버스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첫째 현실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상임이 명백하지만 몰입할 수 있는 것도 있어야 한다. 가상의 건물·인간·시장·인프라 같은 것이다. 그래야 메타버스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인간이 현실과 메타버스를 혼동하지 않게 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둘째 현실 세상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메타버스가 현실 고통을 잊는 마약 역할이어선 안 된다. 현실의 약자가 메타버스에서 강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선 비싼 교육을 메타버스에선 싸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은 돈으로도 누릴 수 있는 서비스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고객이 메타버스를 이용하며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생계에 도움된다. 셋째 메타버스에 부합하는 실물경제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실의 물건이 거래되어도 좋다. 시장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그쳐선 안 된다. 메타버스에서만 팔고 사는 가상의 재화·서비스가 많아야 한다. 아바타가 입을 수 있는 명품 의류·가방을 거래할 수 있다. 게임 아이템을 거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메타버스 안에서 교육·회의 시스템 이용도 가능하다. 가상 재화·서비스가 메타버스 경제에서 온전히 일어난다면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통화가 필요하고, 가상자산이 보조수단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실과의 호환, 연계 및 공존이 중요하다. 현실을 떠난 메타버스는 공허하고, 자아의 충돌과 대립을 가져온다. 우리는 현실 세상에 발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메타버스를 지향해야 한다. 그래야 메타버스는 가상을 넘어 또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