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앞으로도 이전과 같은 성장세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 부호가 달리고 있다. 경제지표는 하락하고, 그동안 우세였던 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비롯한 후발주자 추격이 매섭다. 이미 추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우리가 자칫 쇠퇴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새로운 동력을 확보해 다시금 성장엔진을 달굴 시기다.
전자신문은 과학기술과 산업 분야 전문성, 경륜을 두루 갖춘 오피니언 리더와 신년특별대담을 진행했다. 연구원으로 시작해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최두환 전 포스코ICT 대표,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과 대학교수를 거쳐 우리나라 과기정책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이 머리를 맞댔다. 새로운 조류로 급부상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DX)'을 중심으로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을 실질적 방안을 모색했다.
참석자=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최두환 전 포스코ICT 대표
사회=윤건일 소재부품부장
◇사회=그동안 우리 산업과 경제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성장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최근 한계에 온 듯한 모습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최두환 전 포스코ICT 대표=지금 한국은 성장 또는 쇠퇴의 변곡점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는 '근면성실한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성장을 견인했으나 이것만으로 우리가 당면한 '쇠퇴의 커브'를 벗어나기 어렵다. 일본의 전철을 뒤늦게 걷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일본은 기술, 능력, 근면성실성 모두 갖췄지만, 성장이 정체됐다.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사회=국내 산업 변화를 살펴보면 이미 일본을 닮아가는 경향도 보인다.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일본보다 성장이 빨랐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일본처럼 정체된 전철 역시 예견된다. 벌써 그런 모습이 보인다. 일본을 타산지석 삼아 성장의 커브를 탈 새로운 방도를 찾아 실행해 나가야 한다.
◇사회=퍼스트 무버로 거듭나 새롭게 성장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는 수없이 반복된 듯하다.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일 것 같다.
◇최두환=퍼스트 무버가 될 가장 효율적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바로 산업에 전방위적으로 DX를 도입하는 것이다. DX는 단순히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새로운 IT를 많이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 디지털 마인드'를 갖춰, 새로운 시각에서 산업을 다시 생각하는 '사고의 변혁'이다. '디지털로 이루는 변혁'이란 관점으로 산업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DX를 우리말로 옮길 때, 더 많은 디지털 기술 수용 느낌을 주는 디지털 전환보다, 디지털 기술로 세상을 새롭게 뒤엎는다는 느낌의 '디지털 변혁'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완전 새로운 시각에서 본다면 개선점이 무궁무진하다. 일례로 우리 행정 전산화는 발달해 있는데, 우리가 집을 살 때 수많은 서류를 따로 떼어 제출해야 한다.
◇이우일=전자정부를 표방한 지 오래인데, 관공서 종이 사용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영수증 붙이는 것 때문에 종이와 프린터가 더 잘 팔린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사고체계 변환이 꼭 수반돼야 한다. IT를 더하는 것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디지털화가 모든 것에 스며들게 해 사고체계를 바꿔야 한다.
◇사회=우리가 DX를 통해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장점,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진단한다면.
◇이우일=DX는 모든 산업에 '패러다임 변환(Paradigm Shift)'을 가져오는데, 막 시작 단계여서 모두가 같은 출발선 위에 서 있다. 우리가 미국, 독일, 일본 등과 같은 선에 있다.
근대 이후 이런 상황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은 역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과거 초강대국인 중국이 산업혁명에 대응하지 못해 '잃어버린 100년'을 겪은 것이 대표적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다)을 겪었다. 지금까지 어땠느냐보다, 앞으로 대응이 더 중요한 시기다.
다행히 한국은 달릴 준비가 선진국보다 잘 돼 있다. 이미 IT 강국, 제조 강국, 문화 강국, 교육 강국으로 성장해 성장 기반을 갖췄다. 게다가 도전적인 MX(MZ+X) 세대와 이기겠다는 열정이 있다. 여러 면에서 DX를 향해 달릴 준비가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우리나라는 강하다. 과거 일본 문화개방, 영화 스크린쿼터제 폐지 등도 국민 반대가 있었지만 전부 우리 콘텐츠가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다른 나라였으면 90%는 망했을텐데 우리는 아니었다. '신바람'이 있다. 이는 DX에도 힘을 발휘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 필요한 것은 있다. 차세대 성장과 산업을 구상하고 실행해 DX로 패러다임 변환을 이루겠다는 '사고의 변환(Mind shift)'이다.
◇최두환=우리 강점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자장면 같은 음식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배달시키는 것을 누가 우리보다 먼저 해봤겠나. 게다가 제조업 측면에서 보면, 그동안은 자동화에 맞춰 제품 설계가 이뤄졌는데 디지털화가 이뤄지면 이에 맞춰 제품 설계도 달라진다. 새로운 출발선에 맞춰 변화가 강제된다. 독일과 비교하면 제조업에서 우리가 독일과 비슷하고 IT 분야는 우월하다.
큰 변혁이 있을 때마다 경제질서는 바뀌었다. 디지털 변혁의 시대를 우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고의 변환이 잘 이뤄진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사회=DX를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갈 수 있는 산업 분야를 꼽는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우일=도심항공교통(UAM) 분야를 들 수 있다. 미래에 폭발적 성장이 예측되는 분야고 제조업, IT, 운항 서비스의 총체적 융합 분야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IT, 운항 서비스 분야 모두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나라다. 세부적으로는 아니지만, 총체적 융합 측면에서는 우리가 최고다. 우리 가전 경쟁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세부 분야에서 최고여서가 아니다. 총합된 완성품을 최고로 만들어 내는 것에 최고다.
◇최두환=앞으로 UAM 분야는 제조업과 IT 서비스 등 각 단위 산업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모두가 함께 망라된 총체적 융합 산업이다. 이런 융합을 제대로 이루려면 DX가 필수다. 설계부터 제조, 운항, 정비에 이르기까지 DX 관점으로 변혁을 이뤄야 하는데 한국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중국이 가장 우려되는 경쟁 상대인데, 서구에서 시진핑의 중국몽에 거부감을 지녀 우리가 얻는 기회가 있다. 이미 많은 UAM 제조사들이 중국이 아닌 한국을 눈여겨보고 있다. 우리가 UAM에 뛰어들지 않으면 향후 5년 뒤에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뛰어들어 판을 키워야 한다.
6차 산업도 있다. 1차, 2차, 3차 산업을 곱한 것이 6차 산업이다. 이들을 한 밸류체인에 묶어 융합하는 산업이다.
음식 폐기물(1차 산업)을 곤충 먹이로 활용해 특수 단백질을 생산(2차 산업)하고, 이를 의료와 미용 등 고부가 서비스에 활용(3차 산업)하는 것이 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없다. 어떻게 엮어 생산성을 극대화하느냐가 관건이다. 당연히 1~3차 산업의 총체적 융합이 이뤄지고, 따라서 DX가 필수다.
◇사회=기존 산업에 DX를 도입, 경쟁력을 일신하는 분야도 있을 것이다.
◇이우일=원전 건설 분야가 있다. 원전이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돼 전 세계 원전 건설 붐이 예상되는데, 앞으로 원전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안정성을 요구한다. 과거 건설 방법론으로는 안전 등에 대한 요구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DX 기반 '스마트 건설'이 원전 건설에 필수다. 설계부터 건설, 운용, 재처리까지 전 밸류체인에 걸쳐 디지털화가 필요하고, 총체적 융합인 DX가 필요하다. 기존 원전 건설에 경쟁력을 갖춘 한국이 DX 무장도 제일 빠르다. 중국몽에 따른 반대급부 혜택은 덤이다.
◇최두환=블록체인도 눈여겨봐야 한다. 지금 블록체인 분야가 혹한기를 맞았는데, 코인 이슈를 빼면 웹3.0(Web3.0:데이터 주권이 사용자에게 주어지는 웹) 전개로, 큰 성장이 예견된다. 지금 혹한기가 도리어 기회가 될 수 있다. 이것 역시 IT, 금융, 콘텐츠 등 여러 분야를 아울러 서비스되는 분야로 총체적 융합인 DX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블록체인 제도권 진입을 위한 법규 제정, 기존 산업과 융합을 돕는 규제 완화만 이뤄지면 된다. 물론 현 블록체인 상황을 악용하는 세력이 있고, 기존 관련 분야 반발도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회=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디지털플랫폼정부'도 DX 관점에서 중요할 것 같다.
◇이우일=우리 행정 디지털화는 이미 세계적 수준이다.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더해 기존 행정 시스템 전반을 DX화해 화룡점정을 찍고자 한다. 이를 세계로 진출시켜야 한다. 이 시스템을 개발도상국에 구축해주면 그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연합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최두환=디지털플랫폼 정부가 해외 개발도상국 행정 시스템이 되면, 외국 MZ세대에 우리 한국의 '디지털 메타 시민권'을 부여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디지털 메타 시민권은 한국 디지털 메타세상(Metaverse)의 시민권이다. 이를 부여받은 외국 MZ세대들은 한국 문화와 언어, 제품을 메타세상에서 즐기고, 원격으로 한국에 취업도 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 경제 파급력이 늘고 젊은 취업 인구도 늘어난다.
또 창의력은 융합에서 나온다. 여러 나라 문화의 MZ세대가 어울리면 K-컬처 창의력 강화로 이어진다. 더욱이 우리 인구감소 문제에도 긍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 실제 인구는 5000만명이지만 메타시민은 5억명에 달할 수 있고, 이에 따른 경제 파급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사회=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DX 성과를 보다 강화할 수 있다고 보는가.
◇최두환=민간 주도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 DX로 성공을 이룰 '옥석'을 가리는 일은 산·학·연 협동의 몫이고 지원 정부의 몫이지만, 실행은 기업 몫으로 남겨 둬야 한다.
우리 기업은 이제 사업을 바라보는 동물적 감각이 충분하다. 놓친 부분이 있다고 이를 학·연이 대신하게 하는 것보다는 지원을 늘려 기업이 달려들게 하고, 학·연이 돕도록 해야 한다.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 모습이어야 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이우일=인재 양성·공급이 중요하다. 교육은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고질적인 사회 문제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도 입시 위주 교육에 매몰돼 쓸모 있는 지식 전수가 되지 않고 있다. 또 반값 등록금과 등록 인원 감소로 인한 재정 문제로 대학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렵다. 입시 위주 교육에서 탈피하는 동시에 평생교육 체제를 확립해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 환경에 대응토록 해야 한다.
◇사회=여러 산업 분야가 융합되면 그만큼 규제 정리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우일=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업부, 국토부, 기재부 등 각 부처별 30~40개 규제의 숲을 헤치고 UAM 사업을 진행할 수는 없다.
지금은 분절화된 행정 탓에 상식 밖 규제가 너무 많다. 그러나 디지털플랫폼정부가 실현되면 '데이터 사일로(정보가 조직별로 고립되는 현상)' 해체로 지금까지는 몰랐던 불필요한 규제가 부상하고 고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이 앞으로 정부 핵심 역할이기도 하다. 기업이 노는 놀이터를 만들어도 돌이 있으면 뛰어놀기 어렵다. 규제를 잘 치우는 것이 돌을 없애는 것이다.
◇최두환=단위 사업이 아닌, 포괄적인 비즈니스 관점에서 규제 샌드박스도 허용해 우리가 먼저 목표에 뛰어들 수 있게 해야 한다. 외국의 DX 사례를 보고 난 후 뒤따르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다소 리스크가 있더라도 외국보다 앞서 규제를 정비하고, 뛰어들어야 한다.
오늘 대담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은 국가적 관점에서 DX를 잘 할 수 있는 샌드박스를 만들고 운영하자는 것이다.
◇사회=자국우선주의 보호무역이 날로 강해지는 시점이다. DX가 국가 안보 확보에도 중요 역할을 할 것 같다.
◇최두환=DX로 강화된 우리 산업기술 경쟁력 우위는 우리에게 강력한 '경제 방어력'을 제공한다. 또 '방위적 안보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TSMC 존재가 대만 안보에 큰 도움이 되며, 삼성반도체도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된다. DX로 한국 산업기술이 세계 중심 역할을 하면 당연히 전 세계가 우리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안보 혜택이 따라온다.
◇이우일=DX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국가 시스템은 그 자체로 안보를 담보한다. 단순히 성장동력 발굴이라는 경제 효과를 넘어, 일류국가로 진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정리=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 사진=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
<참석자 약력>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미시건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탠퍼드대와 한국기계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기계공학 교수로 재직했다. 공과대학장과 연구부총장을 역임했으며, 2020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대 회장에 취임했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 첫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에 위촉됐다.
최두환 전 포스코ICT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얻었다. 이후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귀국, KT를 비롯한 국내 기업에서 활동했다. 1998년에는 벤처기업인 네오웨이브를 설립해 코스닥에 상장시켰고 이후 KT 종합기술원장(사장), 서울대 초빙교수, 포스코ICT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