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컴퓨터, 스마트폰, 텔레비전 등 과학기술·정보통신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데아·신과 결별한 인간을 이 세상에 아무 의미 없이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지금의 인간을 디지털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정보통신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디지털 안에서 살고 있다. 디지털이 우리에게서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2022년 2월 짐과 테사는 프랑스 파리발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맥스와 다이앤의 뉴욕 맨하탄 집에 모여 미국 최고의 스포츠 행사인 슈퍼볼 중계방송을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모든 전자기기가 멈췄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하다가 불시착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들은 뉴욕 거리를 걸어서 맥스와 다이앤의 집을 찾았다. 슈퍼볼 중계방송을 기다리던 맥스와 다이앤은 어떤가. 갑자기 텔레비전이 꺼졌다. 디지털 세상이 순식간에 먹통이 된 것이다. 태양 흑점 폭발, 외계인 침공 등 이런저런 추측을 했지만 누구도 원인을 알려주지 않았다. 맥스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갔으나 거리는 비었고, 원인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디지털이 끊긴 상황에서 사람들은 횡설수설한다. 맥스는 텔레비전 앞에서 자신이 슈퍼볼 경기를 중계하는 것처럼 축구 용어와 광고를 쏟아낸다. 짐은 탑승했던 여객기의 비행 정보를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테사는 여행 일정을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은 디지털 속에서 늘 그랬듯이 끊임없이 말을 내뱉지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원인을 추측하지만 맥스를 제외하곤 누구도 원인을 찾으려고 움직이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에서 자판을 두들겨서 검색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맥스가 꺼진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언제 디지털 세상이 복구될지 알려주지 않는다. 미국 작가 돈 드릴로의 소설 '침묵'이다.
눈앞의 사람과 대화보다 메시지를 교환하는 시대다. 디지털이 갑자기 우리 곁에서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 손글씨를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외우던 시절도 있었다. 카드 키를 사용한 뒤로는 출입문 비밀번호를 잊어 먹었다.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손을 떠난 적이 없는 스마트폰이 갑자기 먹통 된다면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일 듯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동굴 속 죄수들은 동굴이 진짜 세계인 줄 알고 동굴 밖 진짜 세계로 나가기를 꺼린다. 우리도 디지털 세상에 갇혀 오프라인 세계로 나가길 두려워하지 않는가.
디지털은 종교, 국가, 거리 등 장애가 단절시킨 오프라인을 연결로 바꾸었다. 시공간이나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디지털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팔로'와 '언팔로', '좋아요'와 '싫어요'를 거듭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견고하게 연결된 디지털이 어느 순간 사라지면 우리는 상실을 경험한다. 디지털 전자기기 없이 소통할 수 없고, 대화는 어긋나고, 속뜻은 허공을 떠돈다. 디지털 전자기기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옛날 세계로 다시 던져진 것이다.
대책은 없는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존이다. 우리는 어느 한 곳에서만 살 수 없다. 디지털 기기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자아는 카카오톡, 스마트폰 메시지, 이메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찾는 검색포털,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도 있지 않다. 오프라인에서 맞닥뜨리는 가족과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알아야 한다. 오프라인 없는 온라인은 있을 수 없고,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을 이용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