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설날이면 대전에 있는 큰집에 내려갈 생각에 일주일 전부터 잠도 이루지 못하곤 했다. 영등포역으로 가서 탑승하는 대전행 무궁화호나 통일호는 철이와 메텔이 타고 있는 은하철도 999 못지않은 감흥을 줬다. 대전역에 내려서 맛보는 가락국수는 상상하는 순간부터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했다. 열린 기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거센 바람을 맞을 때면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 할아버지·할머니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도착도 채 하기 전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친척들은 내려가기 며칠 전부터 각자 맡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셨다. 수십 명의 친척이 삼시세끼를 먹어야 하고 조상님께 올릴 차례상도 빈틈없이 준비돼야 하며 세뱃돈과 간식거리까지 고민해야 하니 명절은 여성에게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명절 연휴 마지막 날이면 집에 가기 싫다며 할아버지 소매를 붙들고 고집을 부리던 철부지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송구함을 느낀다.
최근 한국 유교 총본산격인 성균관의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간소화한 설 명절 차례법을 제안했다. 차례상에 음식이 넘쳐 한참 그릇 교통정리를 해야 하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떡국과 나물·구이·김치·과일 등 4종에 잔·시접(수저 담는 놋그릇) 등 9종을 올린 차례상을 예시로 들었다. 차례상에 기름진 전류를 올려야 한다든가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놓으라는 '홍동백서'나 대추·밤·배·감을 의미하는 '조율이시' 등 세간에 알려진 방식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공표했다.
세월이 흘러 바야흐로 2023년 설 연휴를 보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전통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명절의 키워드는 혈연 간 만남이다. N수를 준비하는 입시생,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 여러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N잡러' 조카, 결혼을 택하지 않은 친척에게 섣부른 동정 또는 권유하는 간섭형 명절에는 작별을 고하고 누가 어떤 선택을 하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는 '격려형' 명절로 전환되어야 할 것 같다. 무조건 여성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명절에서 남녀 구분 없이 음식 준비에서 설거지까지 함께 나서는 협업형 명절로 전환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전환에 테크놀로지의 역할은 지대하다. 앞에서 언급한 음식 조리와 설거지 및 빨래와 세탁물 건조 등 다양한 프로세스에서 전자동 오븐, 식기세척기, 인공지능(AI) 세탁기·건조기의 역할은 매우 크다. 앞으로는 집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서비스 로봇이 간단한 음식 조리와 식기 수거 등 많은 활약을 할 것이다. 이미 상당수의 가정에 설치되어 있는 AI 스피커는 가족 노래방의 DJ 역할을 하고, 햇과일을 즉석에서 살 수 있는 쇼핑몰이 된다. 가정용 콘솔게임기는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이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함께하는 스포츠 기기로 변신한다.
옛날 우리는 어머니와 누이의 얼굴에서 명절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때의 공허함과 산처럼 쌓인 설거지로 말미암은 고통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아빠와 오빠가 나설 때다. 그리고 로봇과 AI 가전제품이 나설 때이기도 하다. 테크놀로지의 도움과 양성평등 가치관을 통해 명절이 조금 더 신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본연의 모습으로 변화하길 기원한다. 전자신문 독자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디지털 대전환의 맨 앞줄에 서 있는 전문가일 공산이 높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러분과 필자 자신부터 더 즐겁고 행복한 명절을 만드는 데 앞장서보길 제안한다.
김장현 성균관대 교수 alohakim@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