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국가원수가 선두에 서서 적극 지원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개발도상국 과학기술 발전사를 연구한 미국 스티븐 데디예르 박사가 한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데디예르 박사의 이 말처럼 최빈국 한국의 과학기술 입국을 향한 담대한 도전에 나섰고, 언제나 그 선두에 섰다.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진흥 열정은 식지 않는 용광로였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4단계를 거쳤다. 제한적인 국가 자원을 적소에 배정하려면 과학적이고 치밀한 사전 검토는 필수였다. 그 단계는 원리 도출, 원칙 수립, 시행 계획 작성, 집행 순이었다.
오원철 전 청와대 제2 경제수석의 회고록 증언. “박 대통령은 체계적이고 장기 안목에서 기술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정책원리를 도출하고, 이어 원칙을 수립했다. 우리 현실에 가장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수립하는 단계다. 사업계획 수립은 각 부처에서 담당했다. 사업 추진 과정은 부처 사업안 작성-장관 결재-대통령 브리핑-종합 검토-사업 확정 순이다. 이때 예산도 배정했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정한 사업을 '대통령 관심사업'이라고 불렀다. 박 대통령은 이런 과정을 거쳐 확정한 큰 사업 기공식에는 꼭 참석해서 축사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당시 각 부처는 해마다 사업별로 1년 예산을 배정받았다. 만약 부처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진행하던 사업도 중단했다. 하지만 대통령 재가를 받으면 사업이 끝날 때까지 예산 걱정은 하지 않았다.
1969년 6월. 상공부가 청와대에서 전자공업 육성 브리핑을 했다. 1976년까지 4억달러를 수출하겠다는 야심 찬 구상이었다. 당시 연 추출액은 2000만달러였다. 박 대통령은 보고가 끝나자 미소를 지으며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말했다. “부총리, 해낼 수 있겠소?” “예,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 전자산업 육성 방안은 8년 동안 추진하는 장기계획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예산이 140억원에 달했다. 막대한 예산을 일시에 확보한 것이다. 이런 결단은 미래를 내다본 박 대통령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는 현장 행정을 중시했다. 그는 매년 연초에 해당 부처와 시·도를 순시해서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 받았다. 각 부처는 지난해 추진 실적과 올해 사업계획을 보고했다. 장관 인사말이 끝나면 담당 국별로 국장이 소관 업무를 브리핑했다. 연두보고를 무사히 끝낸 부처는 안도했다. 하지만 보고를 잘못해서 지적받았거나 전년도 실적이 부진한 부처는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박 대통령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이 명확했다.
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게 탁상행정이었다. 박 대통령은 일단 확정한 정부 사업은 치밀하게 관리했다. 수시로 현장에 나가 사업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귀를 열고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했고, 문제가 있으면 현장에서 즉시 시정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신축 때 박 대통령은 수시로 연구소를 방문해서 실무자로부터 공사 상황을 보고 받았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연구소가 자리 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었다.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연구소를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연구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연구동 신축 현장 인부들에게는 금일봉도 돌렸다. 공사 중에 다른 부처 장관들이 연구소 일에 반대할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 주셨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박 대통령은 재임 중 3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첫 번째는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 두 번째는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 회견에서 발표한 중화학공업 선언과 전 국민 과학화 선언이다. “1980년대 우리가 100억달러 수출과 중화학공업 육성 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 과학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사회 성인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력이 빨리 신장하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경청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청와대 회의나 시·도 순시에서도 박 대통령은 긴말하지 않았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생전 증언. “박 대통령의 청와대 회의 방식은 우선 참석자들에게 발언하라고 한다. 관계 수석비서관이 개요에 대해 발언하고 주무장관, 부총리, 총리 순으로 발언한다.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주요 사항을 메모한다. 회의 끝에 종합해서 이야기하고 결론을 내리는데 주무장관이 '아니요'라고 말하면 다시 토의한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이튿날에 회의한다. 대통령이 밤새 고민하다 장관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 비서실장에게 전화해서 '장관 주장대로 하고, 회의를 소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인사원칙은 적재적소 인재 발탁과 권한 위임이었다. 박 대통령은 부처 장관에게 권한을 위임해서 차관 이하 인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장관이 필요한 사람을 자기 책임 아래 기용해서 소신껏 일하도록 했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물었다.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했다.
박 대통령은 장관을 임명할 때 행정 능력과 적성, 경험, 책임감 등을 면밀하게 평가했다. 일단 발탁한 뒤에는 그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장관들이 소신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초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은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할 때 한 번도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서 오래 일을 맡겨 성공을 거두었다. 과학 불모지인 이 땅에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초대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은 4년 3개월여 재임했다. 그는 초대 장관으로서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에 헌신했고, 과학원생에 대한 병역특례를 조치했다. 2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7년 6개월여를 근무했다. 이는 역대 정부 최장수 장관 기록이다. 최형섭 장관은 도중에 연구소로 복귀하고자 대통령께 건의했으나 박 대통령은 정책의 연속성을 거론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을 9년 3개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데리고 일했다.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재무부 장관에 이어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해서 9년 3개월 동안 근무토록 했다. 중화학공업 발전을 이끈 오원철 경제2 수석비서관도 1971~1979년 청와대에서 일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회고록 증언. “대통령 면담 일정은 비서실이 '인의 장막'을 치는 일이 일절 없도록 각별하게 조심했다. 박 대통령 책상 위에는 면담 신청함이 있었다. 장관 등 면담 신청이 있으면 메모해서 이 함에 신청서를 넣었다. 대통령이 신청함의 메모를 보고 직접 면담자를 결정했다.”
박 대통령은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외 유치과학자들에게 대통령보다 많은 봉급을 지급했고, 한국과학원 학생들에게 학비 면제, 장학금 지급, 기숙사 제공과 병역특례까지 주기로 했다.
박 대통령의 삶은 검소했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전기를 아끼기 위해 아예 에어컨을 없앴고, 비서관들이 가져다 놓은 선풍기도 사양했다. 대통령이 이러니 청와대 직원들은 선풍기를 사용하지 못해서 여름이 되면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이상희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박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과학기술 정책은 대통령 프로젝트여야 한다. 과학기술은 갓난아이와 같아서 부모가 힘을 싣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과학기술은 한 나라의 힘을 기르는 핵심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기르지 않으면 자라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박 대통령은 그 일을 몸소 실천해서 한국 과학기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최형섭 장관의 생전 회고. “내가 과학기술처 장관이지만 실제 장관은 박 대통령이고 나는 비서실장이었다.” 대통령학 권위자인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은 “박 대통령은 강력한 '정책 주도자형' 리더십을 발휘해서 낙후한 과학기술을 진흥시켰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미래를 내다보고 한국 과학기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과학기술 대통령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