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대만 TSMC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매출 1위를 차지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TSMC는 지난해 연간 기준으로는 다소 뒤졌지만 3~4분기만 놓고 보면 이미 삼성전자 매출을 뛰어넘었다.
TSMC는 고객이 제시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맞춤형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회사다. 자체 생산설비 없이 설계에만 집중하는 '팹리스'(Fabless) 회사나 애플처럼 자사 제품에 사용할 반도체 칩을 독자적으로 설계하는 정보기술(IT) 제조업체 등이 주요 고객이다.
이런 파운드리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외주'로 반도체를 제조하는 회사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회장이 회사를 설립할 당시엔 반도체 회사가 설계와 생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미국 반도체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엔지니어로 일한 창 회장은 설비 투자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는 반도체 사업의 특성에 주목하고 남들과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앞으로는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늘 것으로 보고 TSMC를 이들을 고객으로 하는 외주 전문 반도체 회사로 키운 것이다.
사실 설계와 생산 분리는 반도체 산업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전통 제조업에서도 설계와 특허 개발에 전념하고 생산은 외주에 의존하는 업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자금이 부족한 신생 기업의 경우 사업 초기에 직접 생산까지 담당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주 제조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막상 믿고 맡길 외주 제조업체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필자가 창업해서 CEO직을 맡고 있는 에이팀벤처스는 원래 3D프린터를 제조하는 이른바 하드웨어 스타트업으로 시작했다. 회사 설립 초기엔 자체 설비를 갖출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부품을 외주로 조달해야 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생 기업이 남다른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제품으로 만들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신생 기업이 아이디어를 구현할 마땅한 외주 제조업체를 찾지 못해 시장 진입이 늦어지거나 심지어 제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제조업계에도 TSMC처럼 훌륭한 '파운드리' 역할을 해 줄 외주 제조업체의 존재가 절실한 것이다.
'에니아이'(Aniai)는 2020년 여름에 창업한 햄버거 조리 로봇 개발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다. 설립한 지 2년이 좀 넘었지만 일찌감치 미국 아마존(Amazon)의 눈도장을 받았다. 아마존웹서비스(AWS)가 세계 유망 로봇 스타트업을 선별해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선정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올해엔 햄버거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이다.
에니아이 창업자들은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로봇과 인공지능(AI)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들이 짧은 시간에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선택과 집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봇 제조에 필요한 부품은 온라인 제조 플랫폼 캐파(CAPA)에서 만난 제조업체들로부터 손쉽게 조달하고, 자신들의 역량은 기술 개발과 설계에 집중했다. 외주 제조가 필요한 기업이 전문 제조업체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온라인 제조 플랫폼이 이들에게 TSMC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파운드리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앞으로 전통적인 제조업계에서도 파운드리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의 트렌드가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을 거쳐 개인별 '맞춤형' 제품 생산으로 이동하면서 설계와 생산의 분리 경향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각 나라 제조업의 경쟁력은 독자적인 아이디어 및 기술을 갖춘 엔지니어링 기업과 이를 구현해 줄 '파운드리' 업체가 상생(相生)하는 생태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업에서의 파운드리 역할은 반도체 산업처럼 소수의 대형업체들이 담당하기 어렵다. 애플이나 퀄컴 같은 소수의 고객사와 역시 소수의 파운드리 업체가 주문과 생산을 독과점하는 반도체 산업과 달리 전통 제조업에선 요구가 각기 다른 수많은 고객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상대할 외주 제조업체 역시 규모는 작고 숫자는 많다. 이에 제조업의 파운드리는 각자의 전문성을 띤 제조업체들을 모아놓은 풀(pool)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 유리하다. 즉 '배달의민족' 같은 플랫폼에 분야별 전문 제조업체들을 등록하고 외주로 제품(부품)을 제조하려는 고객사들이 음식을 주문하듯 손쉽게 주문하는 '온라인 제조 플랫폼'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해외에선 이 같은 온라인 제조 플랫폼 이용이 확산하고 있다. 이 분야 선두 주자인 미국의 경우 조메트리(Xometry)를 비롯해 이미 증시에 상장된 업체도 적지 않다.
비록 후발주자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 플랫폼을 기르기에 좋은 환경이 있다. 여타 선진국에 비해 제조업 비중이 높고, 영세하지만 숙련된 기술력을 갖춘 제조업체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대기업 하청 위주로 영업해 온 이들 업체는 대기업 일감이 줄면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을 제조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면 이들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플랫폼 입장에선 어떠한 고객의 주문에도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제조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수 있다.
크리스 앤더슨은 '롱테일 법칙'이란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향력 있는 IT 저술가다. 앤더슨은 '메이커스'라는 또 다른 저서에서 미래의 제조업 시장에 대해 “근로자 수십만명을 고용해서 대량생산 제품을 파는 대기업이 하나 있으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새로운 소기업 수천개가 공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제는 수천, 수만개의 제조업체들이 연합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제조업의 '파운드리'를 만들어야 할 때다. 뒤늦게 외주 제조의 잠재력을 깨닫게 해 준 TSMC가 우리에게 던진 교훈을 전통 제조업에서 반복해선 안 된다.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 kosan@capa.ai
〈필자〉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는 제조업체 매칭플랫폼 캐파(CAPA) 서비스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에이팀벤처스의 대표다. 2007년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예비)후보로 선발돼 러시아 가가린 우주인훈련센터에서 우주인 훈련을 받았다.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 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창업 지원 비영리기관인 타이드인스티튜트 대표,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