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 연구의 핵심은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융·복합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다. 예전엔 많은 문제를 하나의 학문이나 이론으로 해결하기 어려워서 협업이 필요했지만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대부분 문제는 융·복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게 됐다.
뇌 연구도 마찬가지다. 생물학, 의학, 약학, 심리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 다양한 학문이 뒤섞인 종합과학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학계에는 여전히 학문 간 벽이 높다는 점이다. 같은 용어를 두고 전공별로 의미가 다른 경우도 적지 않아 소통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질적 학문 간 협력은 근본적으로 어렵고 번거롭다. 물리학자와 화학자는 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한다. 이들이 협력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번역해야 하고, 익숙해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할 정도의 동기와 목표가 필요하다. 따라서 학제 간 '융복합'은 우리 사회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 목표나 문제 설정 없이 학문 간 협력을 장려하려는 구호나 노력이 여지없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시대로 빠르게 시장이 재편되면서 '소프트웨어(SW) 중심 차량 설계'(SDV)가 중요해졌다. 카메라·라이다·레이다·적외선 등 다양한 센서와 컴퓨터, 제어기 간 대용량 정보의 실시간 전송이 중요해지면서 차량 네트워크 분야가 획기적 변화를 맞았다. 저속 데이터 차량네트워크 기술의 한계가 명확해지면서 필자는 사무실에서 아주 빠르게 대용량 정보를 전송할 수 있는 이더넷(Ethernet), 데이터 센터나 고화질 디스플레이에 적용되는 서데스(Serdes) 기술을 차량에 접목하고자 했다.
기존 통신 시장에서 이더넷과 서데스 기술은 융합 기술이라 부르기에는 어려운 전통 기술에 속하지만 차량 특성과 요구사항 등을 반영, 차량 네트워크에 적용하는 것은 기존 상용 네트워크 기술과 차량 분야 지식을 접목해야 하기 때문에 두 분야의 전문가가 협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다.
뇌공학 분야도 역시 마찬가지다. 뇌과학과를 일찍부터 설립하고 부설기관으로 국립뇌연구원을 보유한 DGIST는 신경과학, 생물학, 의공학, 의료소자, 영상처리, 의료반도체 등 관련 전문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인프라와 초기 연구비 지원도 컸다.
뇌과학에 문외한이던 필자가 뇌 융합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뇌의 신비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융복합 해부학, 융복합 생리학, 융복합 신경과학 등 융·복합 과목을 개설하면서 의대 교수진과 공학 교수진이 수업을 공동 진행했고, 서로의 분야를 배우는 계기가 됐다.
파킨슨병 완화를 위한 뇌임플란트 기술 과제를 총괄 진행하면서 신경과학과 의료소자 및 반도체, 동물 실험,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했다. 또 전문 분야인 통신 및 신호처리 기술을 생체 내외 정보 전송과 뇌신호 처리에 접목할 수 있었다. 짧지 않은 그동안의 협력과 소통을 통해 뇌임플란트 디바이스 개발 및 실증 수준이 크게 향상됐고, 각자 따로 하면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도 뇌임플란트를 개발할 수 있었다. 융·복합 결과물이다.
필자의 연구실 책장에는 대학생 때부터 공부한 전자공학·통신공학·정보이론 등 서적과 함께 자동차공학·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분야 서적, 생명과학·신경과학·의료기기 관련 서적들이 배치돼 있다. 차량 네트워크와 뇌공학이 겉으로는 상당히 이질적이라 느낄 수 있지만 더욱 먼 미래의 휴머노이드 네트워크 연구개발(R&D)에서는 두 분야가 결합하는 그림이 그려진다.
영화 '아이언맨'과 같이 인간과 비슷한 로봇 휴머노이드 개발 시 현재의 간단한 로봇 네트워크는 더 이상 적용이 어려울 것이다. 더 복잡한 차량 네트워크에서 출발해 인간의 신경망을 최대한 모사한 인간모사 네트워킹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연구한 차량 네트워크와 뇌공학적 지식이 기존 지식으로써 새로운 융합 분야의 주춧돌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융복합 연구를 위해서는 관련 전문가 풀(Pool)이 풍부해야 하며, 융복합 인력 양성과 교육이 중요한 화두가 된다. 다행히 DGIST는 뇌공학과 같은 융복합 연구 주제들을 활발히 다루고 있다. 서로 다른 전공 교수들과 연구원, 학생들이 함께 협력해 연구를 진행한다.
사실 서로 다른 분야 간 융·복합은 특히 학생들에게 어려움이 많다. 융·복합의 가치를 설명하고, 장기간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2~3년 정도 꾸준히 노력하면 변화의 조짐을 느낀다.
몇 해 전 알파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딥마인드사 대표 데미스 허사비스가 컴퓨터공학을 학부 과정에서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융·복합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학생들 머릿속에 자리 잡고, 다른 학문에 대한 이질감도 사라진다.
융·복합 인력 양성은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최근 유튜브·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을 통한 정보의 활발한 공유, 과학과 인문학 결합 분위기 고취 등이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급변하는 세상이 던지는 문제들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문제 기반 학습'(PBL)이 중요하다. 학생들이 문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여러 학문을 활용할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냥 '효과적으로' 해결하라고 요청할 뿐이다.
결국 융·복합 인재들은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띠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이 가능한 유연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 타인뿐만 아니라 AI를 갖춘 기계와도 경쟁해야 할 우리는 융·복합 인재가 될 수 있도록 기초 공부를 탄탄히 다지고, 다른 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로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디지스트에서도 이러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수학, 물리, 화학, 생물의 기초 과목들을 필수로 배워 기초를 탄탄히 하고 폭넓은 기초 지식을 기반으로 자신의 관심 분야를 찾게끔 도와주고 있다. 전공을 지정하지 않고 제한 없는 트랙 제도를 운영하고, 3학년 학생들은 4명 이상의 학생들이 그룹을 조직해 UGRP(Undergraduate group research program) 라는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며 동료들과 협력하는 방법도 고민하는 시간을 부여한다. 이 때, 기대처럼 적성이 맞는 경우에는 추후 심화 과정을 진행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4학년에서 다른 주제로 UGRP를 수행할 수 있게끔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무학과 단일학부라는 새로운 시스템 아래 보다 유연하게 운영 가능해진다.
심신 성장과 함께 관심 분야도 변화하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분위기의 교육도 필요하다. 희망 진로 설문 시 흥미롭게도 해마다 자신의 관심 분야가 달라지는 학생 비율이 상당하다. 학생들의 성장과 생각의 변화를 실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공을 변경하거나 다른 분야와 접목하려는 시도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허사비스와 같은 융·복합 인재들로 가득 들어찬 연구 현장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최지웅 DGIST 뇌공학융합연구센터장(전기전자컴퓨터공학과 교수)
〈필자〉 최지웅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전기전자컴퓨터공학과 교수는 현재 DGIST 뇌공학융합연구센터장직을 맡고 있다. 서울대 전기공학부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친 뒤 실리콘밸리의 마벌세미컨덕터에서 근무했다. 유무선 통신 및 신호처리 기술을 전공했다. DGIST에 부임하면서 차량용 네트워킹 및 보안, 뇌공학,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등 다양한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