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예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버트 하인리히(H. W. Heinrich)는 “산재 예방은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산재 예방이 원리와 전문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상식을 역설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지난 정부에서 이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 다반사여서 현 정부에서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감이 점점 실망감으로 변해 가고 있다. 원리를 도외시한 관료의 비전문적 행태가 전 정부와 겉모양만 다를 뿐 본질적인 면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석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편법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생색내기에 좋은 것만 골라 하는 고질적 행태가 도지고 있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될 경우 그 제도가 현장에 안착하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정부 본연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는 예방시스템 개선 없이 처벌만을 능사로 생각했고, 현 정부는 전문성 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비과학적 산재 예방 행정의 최근 사례로 위험성평가 정책을 지적할 수 있다. 위험성평가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 구성부터 예견됐다. 위험성평가 비전문가로 TF를 채운 사실로 볼 때 위험성평가 제도 개선에 과연 진정성이 있었는지 의심이 든다.
그 결과가 이달 7일 발표한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고시) 개정 행정예고안'이다. 위험성평가를 실질화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위험성평가 수준을 낮춰 확산하겠다는 단선적 발상이 드러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확산은 되겠지만 더 이상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안전관리 방법에 따른 위험성평가는 아니게 된다. 사실상 위험성평가 제도를 없애겠다는 것과 같다.
행정예고안은 위험성평가가 실시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실시되는 이유에 대한 진단부터 잘못됐다. 위험성 추정이 빈도와 강도를 계량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라는 전제지만 그렇지 않다. 위험성평가는 반드시 계량적으로 계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등급화하는 정도의 정성적 방법이 일반적이다. 산재 예방 선진국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작업에 대해선 계량적(정량적) 방법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계량적 방법으로 실시되지 않는다.
처방도 잘못됐다. 고용부는 위험성평가가 잘 실시되지 않은 이유로 위험성평가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들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정부가 그동안 위험성평가 활성화를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 크다. 안전보건공단에만 맡기고 스스로는 직무 유기에 가까울 정도로 방치했다.
특히 위험성평가 실질화를 위한 노력은 사실 한 게 없다. 이제 와선 위험성평가 발전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핵심 절차인 위험성 추정을 아예 없애겠다고 한다.
위험성평가에서 위험성 추정을 빼면 더 이상 위험성평가라고 할 수 없다는 상식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위험성 추정이 효과적이면서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기반 조성이 정부 책무임에도 이를 소홀히 하면서 위험성평가를 일상안전활동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위험성 추정을 없애겠다는 건 작업에 위험이 있다고 해서 적절한 관리를 통해 위험을 방지하기보다는 어렵고 귀찮으니 작업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과 유사하다.
국제기준(ISO 45001·31000, ISO/IEC Guide 51 등)과 산재 예방 선진국 모두 위험성평가에서 위험성 추정을 포함시키고 있다. 위험성 추정은 위험성 결정과 위험성 감소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위험성 추정을 생략하면 위험예지 활동과 같은 안전 활동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위험성평가의 부실한 운영 현실에 편승하려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행정예고안에는 이 밖에도 위험성평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국제 기준, 학문적 개념과 맞지 않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위험성평가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대부분 국제 기준 또는 실무적으로 정체불명이거나 위험성평가 방법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방법들이다.
고용부는 위험성평가를 얄팍하게 이해한 채로 행정예고안을 용감하게(?) 마련한 것 같다. 문제 해결은커녕 오히려 꼬이게 할 것 같다. 위험성평가 수준을 끌어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알맹이 없는 위험성평가로 대신하겠다는 꼼수와 무지가 놀라울 뿐이다. 그동안 위험성평가의 발전을 위해 소홀히 한 것을 덮으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위험성평가가 더욱 형식화될 것은 불 보듯 훤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위험성평가를 하향평준화하려고 하는가.
위험성평가 활성화를 위해선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위험성평가 미실시에 대해 벌칙을 부과하는 게 급선무이다. 그런데 고용부는 2017년 1월 지방관서에 내린 '위험성평가 미실시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지 마라'는 황당한 지침을 지금까지 철회하지 않고 있다. 법에서 안전관계자를 통해 위험성평가를 실시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를 부과토록 하고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지 않은 채 위험성평가를 활성화하겠다는 건 노동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또한 사용 단계의 위험성평가 내실화 전제인 설계·제조 단계의 위험성평가에 대해선 아무런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행정예고안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정책의 한 사례일 뿐이다. 올해 1월 구성된 '중대재해처벌법령 개선 TF'도 산업안전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고 대부분 법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이런 구성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의 구성 요건에 대한 올바른 방안이 나올 수 있을지 자못 의문이 든다. 산업안전 전문성이 없는 상태에선 개선보다 개악으로 흐를 공산이 높다.
10일 출범한 '산업안전보건법령 정비추진반'도 실망스럽다. 좌장을 위시한 구성원 면면을 보면 올바른 개선안을 내놓기에는 학식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적지 않다. 전문성보다는 구색 갖추기에 급급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숫자는 많지만 넓게 봐도 산업안전 전문가라고 할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구성으로 산업안전보건법령을 정비하는 체제를 갖췄다고 하는 건 책임행정과 거리가 멀다.
산업 구성이 유사한 미국, 일본 등보다 훨씬 많은 산재예방행정 인력과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실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기업 같으면 문책이 이루어졌을 법하다. 산재예방행정을 전문 조직으로 혁신하지 않고는 '고비용 저효과' 행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전문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정부가 바뀌더라도 포장만 다를 뿐 졸속대책은 계속될 것이다. 행정예고안과 TF·정비추진반은 그것이 현실화한 예에 불과하다.
안전으로 유명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정부의 안전문화가 조성되지 않고는 기업의 안전문화도 조성되기 어렵다고 꼬집고 있다. 정부의 아마추어 행정이 계속되는 한 우리나라에서 안전일류기업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거친 산재예방정책은 기업에 선진적인 안전 구축에 걸림돌로 그치지 않고 안전관리를 뒤틀리게 한다. 비대해진 산재예방 행정 조직은 설익은 대책 양산으로 현장의 산업안전을 혼란에 빠뜨린다.
산업안전에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로펌, 컨설팅 기관뿐만 아니라 학자들마저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중심을 잡기는커녕 무늬만 전문가인 이들에게 휘둘리면서 시장 문란을 조장하고 있다. 이는 결국 노동자 피해로 돌아간다. 정부의 존재 이유를 묻고 싶다.
산재 예방 선진국은 공통적으로 위험성평가 기반 조성과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 안전 원리 및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정교하고 상세한 가이드라인과 이에 기초한 업종별·작업별 실시방법·요령 등을 다양하게 개발해서 기업들이 위험성평가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유도한다. 이와 함께 위험성평가와 상호보완 관계에 있으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안전 활동, 작업 절차 등을 실질화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제도 개선을 추진할 때는 관료의 전문성에 입각한 정확한 현실 인식과 정교한 방법론에 터를 잡고 철저하게 높은 학식과 경험 중심으로 외부 전문가를 위촉한다. 제도개선 추진단에서 정치색과 구색 갖추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산업안전이라는 배가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선장인 정부부터 올바른 방향으로 항해하겠다는 진정성과 항해에 대한 전문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산업안전이 '감'이 아니라 '과학'에 기초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 조건이다. 이는 산업안전이 '저비용 고효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 교수 jjjw35@seoultech.ac.kr
〈필자〉정진우 교수는 서울대 치대를 자퇴하고 행정학·경제학·법학을 공부했다.(일본 교토대 법학석사, 고려대 경제학석사·법학박사) 행정고시 합격 이후 약 20년 동안 줄곧 노동부(산업안전부서 등)에서 근무했다. 2015년부터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에서 안전관계법, 안전관리, 안전심리 등을 연구하고 있다. 산업안전 분야 국내 최고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안전 전문 서적을 10여권 출간하는(3권은 우수학술도서에 선정) 등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