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심상치 않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를 피해 한국에서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경쟁이 격화할수록 한국에서 연구개발(R&D) 기능을 강화하고, 기업 인수 추진 사례도 확인됐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국내 인력과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
이달 2일 중국이 한국에 R&D 기능을 두고 반도체 기술 습득에 나서고 있다는 본지 보도 후 추가 사례가 확인됐다. <본지 3월 2일자 1·3면 참조>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에 있는 A사. 간판에 중국 시안시(XIAN)를 지칭하는 영문 사명이 기재됐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이 회사는 2020년에 설립됐고, 반도체 설계 및 제조·판매업을 사업 목적으로 했다.
취재 결과 2000년대 중반에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던 B씨가 A사 설립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에 반도체를 공급할 목적으로 중국 현지에 회사를 차렸고, 한국에도 A사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실제 등본에는 B씨의 가족으로 보이는 인사가 한국법인 대표로 등재됐다.
또 다른 업체인 C사는 홍콩 본점의 해외 영업소로, 한국 내 제품 판매와 마케팅을 목적으로 한다고 등기부등본에 게재돼 있었지만 이와 다르게 지난해 말 아날로그 회로 설계 경력 엔지니어를 채용했다. C사는 엔지니어 채용 조건에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업계 최고연봉과 최고 인센티브를 지급하겠다고 내걸었다.
앞에서 확인한 판교·정자 등 분당구 일대에서 R&D 중인 중국계 기업 3개사와 추가 취재로 나타난 2개사를 포함하면 벌써 5개사에 이르는 중국계 기업이 한국에서 반도체 기술 습득을 진행하고 있었다. 일부는 후속 취재가 이뤄진 1개월도 채 안 된 기간에 채용 인력을 늘리는 등 빠른 충원 속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업체가 한국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사례도 확인됐다. 연매출 100억원이 넘는 국내 반도체 집적회로(IC) 업체를 중국이 인수하기 위해 실사를 진행하고 있다. 최종 계약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의 반도체 규제 수위가 높아지면서 중국이 기술 확보를 위해 한국에 R&D를 강화하는 한편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반도체 장비와 기술, 인력 등의 유입 길이 막히자 한국으로 우회로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한 팹리스 업체 대표는 “회사는 한국에 그대로 둘 테니 매각하라는 중국 회사의 제안 사례가 미-중 갈등 이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중국은 반도체 자립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2014년 1387억위안(약 26조7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육성 펀드를 조성했다. 반도체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2019년에는 2042억위안(39조3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만들었다. 이들 자금이 한국 투자와 기업 인수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R&D 투자와 기업 인수는 합법적이라 해도 국내 산업의 경쟁력 저하를 불러올 수 있어 우려된다. 특히 기술 유출 가능성이 짙어 주의가 요구된다. 적지 않은 처우를 제공한 만큼 단기 성과를 요구하게 되고, 이에 영업비밀 침해나 자료 유출 등 기술 유출이 발생할 수가 있다. 이직 과정에서 엔지니어가 과거 몸담은 기업의 기술 자료를 반출하다 적발돼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사례도 확인됐다.
송윤섭기자 sy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