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기업 KT가 어지럽다. KT 안팎을 두루 경험한 경영자이자 통신과 디지털 산업 전문가 입장에서, 최두환 전 KT 사장·전 포스코DX 대표가 혼란의 본질과 앞으로의 KT 사업방향을 3회 기고를 통해 조망한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걸쳐 한국 정보통신기술(ICT)산업은 빠르게 발전했다. 전자교환기, 광통신, xDSL 기술개발에 힘입어 초고속 인터넷이 전 국민에게 보편화되면서 한국은 인터넷 서비스에서 세계 선두를 달렸다. CDMA, LTE 등 이동통신 서비스도 국내 기술로 세계 첨단을 내달았다.
◇ICT산업을 이끌었던 맏형 KT
이 자랑스런 성장의 바탕에는 국가 기간통신사업자 KT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KT는 대·중·소 기업에 걸친 ICT산업의 선단(船團)을 구성하고, 이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ICT산업의 미래 방향을 제시했고, 기술개발 투자에 앞장섰다. 개발된 시스템은 현장에서 즉시 검증되게 했고, 검증된 시스템은 통신망에 과감히 투입해, 한국의 통신시스템과 통신망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통신시장에서의 주도적 역할로 KT는 ICT산업 생태계를 만들었고, 기술발전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었다. 이는 ICT산업 발전으로 이어져 한국이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이 되게 했고, 더불어 통신사업자 KT의 지속적 성장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ICT산업 생태계의 선두함(先頭艦) 역할을 함으로써 KT는 자체 성장과 함께 한국 ICT산업 발전의 선순환을 이끌어 왔다. KT구성원들은 스스로가 한국 ICT산업 발전을 이끈다는 자긍심으로 뿌듯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KT는 이런 역할에서 조금씩 발을 빼기 시작했다. 기술개발 투자는 줄어들고, 차세대 통신시스템 개발은 미뤄지고, 신규 시장을 창출할 새로운 서비스 출시는 지지부진 해졌다. 통신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신규 투자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서비스가 성장으로 이어지고, 성장으로 얻어지는 수익이 재투자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가 깨지기 시작했다.
◇ KT 성장 정체와 ICT산업의 와해 이유
그 이유는 두 가지에 기인한다. 하나는 인터넷과 이동통신 수요가 급격히 자연 증가하면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매출과 수익의 지속적 증가가 예견되어, 미래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해도 상당기간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시장상황 때문이었다.
이런 시장상황에서는 해외시장 진출 또한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손쉬운 국내 시장에만 안주해도 당분간은 적잖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기에, 국내 통신시장 지분경쟁에만 매몰되어 갔다. 여러 번의 개발도상국 진출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통신시장과는 동떨어진 우물 안 개구리로 안주하는 쪽을 KT는 선택했다.
다른 하나는, KT 구성원들의 바램과는 달리, 마침 이 시기에 KT 본연의 가치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KT 경영진으로 대거 들어서는 것에 기인한다. 소위 ‘KT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들은 이 시기에 자기들 이익과 안녕을 위해, KT의 장기적 성장보다는, 당해 연도 재무제표에서 화려한 숫자를 보여주겠다는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당장에 보이는 재무제표의 숫자는 좋게 나타나, 그들의 존속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 개발과 통신망 구축이 지연되고, ICT산업 경쟁력은 점차 약화되면서, 국내 ICT산업 생태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무선 인터넷 최강국의 지위는 잃어 가고, 국내에서 개발된 시스템과 서비스는 찾아보기 조차 힘들다. 우리 ICT산업 경쟁력은 이제 세계적으로도 크게 뒤쳐진 상태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000년대 초 중국 화웨이와 지금의 화웨이를 비교해보면 된다. 우리 기업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던 화웨이는 지금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그런 경쟁력을 가진 우리 ICT기업은 거의 없다. 아쉽게도 안타까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탈(脫)통신’ 프레임을 빼든 KT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이유로 미래성장 투자가 줄어들면서, KT의 성장 또한 당연히 움츠려 들었다. 한때 좋은 시절의 기억으로 머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수요가 자연 증가하는 시장상황에서는 경영에 관계없이 매출과 이익은 증가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계속 유지될 수 없다. 그때뿐이다. 재원의 여유가 있을 때 미래성장에 투자하는 것을 게을리 했기에, 기존 통신서비스가 포화된 지금, 성장은 멈추고 이익은 메말라 가고 있다. 이제는 투자할 재원조차 만들기 쉽지 않다. KT의 미래 전망이 암울해진 것이다.
그러자 KT는 소위 ‘탈(脫)통신’이라는 프레임을 빼 들었다. 과거 투자 기피로 현재 수익이 떨어지는 것을 마치 통신산업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통신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잘못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감추려 드는 꼴이다.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의 디지털 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ICT산업을 뒤쳐지게 만드는 이런 잘못된 모습에서 KT는 가능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를 우리는 ‘탈(脫)통신’이 아닌 ‘초(超)통신’으로 맞아야 한다. 5G+클라우드(Cloud)+인공지능(AI) 기반으로 디지털 시대의 디지털산업을 원활히 지원하는 차세대 통신 인프라와 플랫폼이 초(超)통신이다. 디지털산업의 기반이 되는 초(超)통신으로 하루빨리 전환하지 못하면 국내 디지털산업 전체가 경쟁력을 잃게 된다.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다. 그런 만큼 바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다음 기고인 ‘디지털산업 부흥을 위한 초(超)통신 전략’에서 이를 논의한다.
최두환 전 KT 사장 ·전 포스코DX 대표
〈필자〉최두환 전 KT 사장·전 포스코DX 대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벨 연구소를 거쳐 벤처기업 네오웨이브를 설립했다. KT 사장과 포스코DX 대표를 역임했다. 광통신, 초고속 인터넷, 방송·통신·인터넷 융합 분야 기술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이를 산업으로 성공시켜 한국이 IT강국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 디지털 전환 선구자로 제조업이 하드웨어(HW) 사업에서 솔루션 사업으로, 나아가 서비스업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정보통신 분야 최고 영예인 ‘한국정보통신대상’을, 2019년 전자공학 분야 최고 영예인 ‘대한전자공학대상’을 수상했다. 앞서 1989년에는 뛰어난 연구개발(R&D) 능력으로 벨 연구소의 ‘Distinguished Member Award’도 1989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