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빈 로서리 감독의 영화 아카이브를 보자. 회사는 유족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도록 죽은 사람의 기억과 의식을 일정 기간 보관하는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 엔지니어 조지 알모어는 아내 줄스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조수석에 있던 줄스는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줄스를 잊지 못하는 조지는 회사 아카이브에 저장된 줄스의 기억과 의식을 인공지능(AI) 로봇에 이식해 재생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줄스의 재생에 성공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에게서 온 전화일까. 여기에 반전이 있다. 전화기 저편의 여자 목소리가 흐느끼며 말한다. “여보, 그만해. 당신은 죽었어. 이제 편히 쉬어.” 그렇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줄스가 아니고 조지였다. 그의 데이터가 아카이브에서 마치 자신은 살아있고 줄스가 죽은 것으로 착각해 그녀를 복원하는 연구를 했던 것이다.
고인이 된 가수, 배우 등 연예인과 불의의 사고로 떠난 가족을 디지털로 복원해 유족, 지인과 만나게 하는 방송프로그램이 감동을 주고 있다. 부모님 등 돌아가신 가족의 음성, 영상 등을 AI로 합성해 유족에게 제공하는 상용 서비스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무속인을 통해서나 듣던 고인의 모습을 VR기기와 모니터를 통해 듣고 볼 수 있게 된다. 디지털시대에 고인을 가상현실로 복원하는 것을 허용해야 할까.
고인이 된 화가, 작곡가, 가수, 소설가, 시인, 사진작가, 배우 등을 복원하고 AI를 통해 그들이 실제 만들고 활동했던 작품과 비슷한 작품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해 내놓을 수 있다. AI가 만든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자.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클래식 음악이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자. 마릴린 먼로의 신작 영화가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재미있고 감동적일지 모르겠다. 그 감동이 얼마나 오래 갈까. 초기에는 관심을 끌다가 서서히 도태될 수 있다. 새로운 작가들은 고인이 된 예술가들의 부활로 창작과 시장에서 두각을 낼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시장에만 맡겨야 할까. 과거가 현재로 복제, 재생산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장례의식을 치른다. 상당한 기간 마음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남지만 그렇게 보내드리고 유족은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고인이 데이터 형태로 남아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면 가상현실로 불러내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고인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존중돼야 한다. 사람에 관한 데이터 복원에 윤리가 필요한 이유다.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에 고인의 계정이 오래 남아 있는 경우도 뭔가 어색하다. 오프라인에서 사망신고가 되면 관공서 등 모든 기록에서 고인의 흔적이 지워진다. 온라인에서도 고인의 데이터 흔적을 지워드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디지털 장의 서비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유족도 고인을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고인을 기억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할 수 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낡은 사진 몇 장과 아련한 기억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데이터도 사진, 음성, 영상 등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된다. 고인을 생생하게 부활, 환생시키는 정도에 이른다면 고인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누군가 당신이 사망한 뒤에 데이터, AI를 통해 부활시키겠다면 선뜻 동의하겠냐고.
데이터,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기 위해 활용돼야 한다. 시장의 수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는 악마의 기술이 되어선 안된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야 하는 분들을 복원, 온라인 공간에 돌아다니게 하는 것이 정녕 옳은지 다시 생각해 보자.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