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버즈워드(buzzword)’라고 불리는 일종의 유행어에 민감한 편이다. 5~6년전 우리 사회를 달궜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를 보자. 구글트렌드 등 검색어 정보서비스를 살펴보면, 이 단어는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뜨거웠다. 대통령직속 위원회도 생겼고, 모든 정부기관이 4차산업혁명 관련된 ‘건수’가 없느냐며 교수와 전문가를 채근하기도 했다. 관료의 승진도 결국 이런 버즈워드를 어떻게 타고 넘느냐에 달려있다 보니, 다소 거품이 있음을 알면서도 열심히 밀기도 하고, 끌기도 하는게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이제 그 단어들이 다소 지겨움을 주기 시작하면서, 메타버스, ESG 같은 단어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메타버스는 페이스북이 사명을 메타로 바꿀 정도로 공을 들이는 분야이긴 하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국산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 등도 한때는 많은 주목을 끌었지만, 이제는 이용자 수가 정체되어 있는 실정이다. 마인크레프트, 오큘러스 등의 이용자도 점점 줄고 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2018년 경부터 대대적인 경쟁을 벌여왔던 메타버스 플랫폼이 이제는 적자를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의 시간은 곧 메타버스가 사라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술은 의도치 않은 파생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냉전 시기, 소련의 핵공격으로 미군의 지휘부가 파괴되었을 때를 대비해 만들었던 분산형 네트워크 시스템 ‘알파넷’은 지금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인터넷으로 성장했다. 원격지로 데이터를 송·수신하고자 하와이에서 시작되었던 ‘알로하넷’은 무선인터넷의 효시가 되어 지금도 많은 유무선 정보통신 서비스의 근간이 되어주고 있다. 메타버스에 대한 엄청난 투자가 있었던 지난 수년 간의 ‘버블’ 기간 기술은 진보했지만 아직 이용자가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만들어 놓은 기술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AI)도 하나의 버즈워드에 불과하다는 비판론도 있다. 그러나, AI는 이미 두 번 이상의 ‘겨울’을 견디어 낸 내공깊은 기술이기도 하다. 그렇게 피어난 꽃이 바로 챗GPT와 같은 생성형AI라고 할 수 있다. 초거대언어모델을 기반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모사하기 위한 노력이 이제 꽤 괜찮은 성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자연어 처리 기술과 비전분야 연구성과가 결합하면서 이제는 글을 그림으로 바꿔주거나 그림을 말로 풀어주는 융합형서비스가 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배경음악을 알아서 작곡해 주고, 텍스트만 입력하면 삽화도 알아서 그려주는 서비스들이 등장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러한 기술변화의 방향은 쉽게 예상하기가 어렵다.
기술과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ESG라는 버즈워드도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일각에서는 이 단어도 결국 90년대 이후 계속되어온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것으로, 조만간 사라질 버즈워드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관론과 달리 주요 국가의 기업회계기준, 공시 기준 등에 ESG 항목들이 점점 더 제도화되고 있는 흐름이 뚜렷하다. 이제 ESG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기업이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하는게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버즈워드가 일시적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기술도 진화하고 사회도 진화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뭐가 반드시 뜰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보다는 한 분야에서 차분히 내공을 쌓아가는 사람을 따르는게 필요한 시기다.
김장현 성균관대 교수 alohakim@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