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역사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난 1688년은 영국이 금융 강국으로 떠오른 분기점이라 한다. 이 시기 많은 금융업자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채권거래, 중앙은행 제도와 같은 금융 유전자를 가져왔다. 체계화되지 않고 사적 거래에 머물던 금융체계가 비로소 정립되고 시장 또한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런 금융발달이 훗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촉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금융이 발전하며 실물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현대에는 급속한 산업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금융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이 산업 전반으로 깊숙이 스며드는 변화 속에 ‘디지털 금융’도 경제성장의 새로운 모멘텀으로 부각되고 있다.디지털 금융 체계로의 진화는 기존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금융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과 같은 디지털 신기술이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다. 또, 디지털 금융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빅테크와 핀테크 기업이 새롭게 합류하며 금융 지형에도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우리 디지털 금융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조망이 필요하다.
◇미래 경쟁력을 결정짓는 디지털 신기술
디지털 혁신 속도가 가속화되며 디지털이 전 산업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금융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은행 점포는 스마트폰으로, 점원은 자산관리 앱으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앞으로는 AI·블록체인·사이버 보안·클라우드 컴퓨팅과 같은 디지털 신기술이 금융업의 판을 바꿀 것이다. 금융서비스의 품질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또 완전히 새로운 금융서비스로 확장될 것이다.
디지털 금융은 금융서비스 자동화에서부터 시작됐다. 챗봇, 로보어드바이저와 같이 디지털이 한정된 분야에서 활용됐다. 최근에는 ‘AI’가 보편화·고도화됨에 따라, 신용평가위험관리, 로봇프로세스자동화(RPA), 이상거래탐지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앞으로도 챗GPT와 같은 초거대 AI를 통해 맞춤형 투자·재무분석·자산운용 등에 본격 활용되며 금융업을 발전시키는 ‘성장동력’이 될 것이다.
AI와 함께 디지털 금융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이 ‘블록체인’이다. 디지털 자산을 안전하게 소유하고 거래할 수 있게 하는 ‘필수기술’이다. 이를 통해 대체불가능토큰(NFT), 증권토큰발행(STO)와 같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금융서비스가 가능하게 된다. 또 분산신원증명, 사기 방지, 송금결제와 같은 프로세스 개선에 활용되며 비용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편, 모든 네트워크는 빛과 그림자와 같이 안전성과 위험성이 공존한다. 네트워크 해킹 위험은 무엇보다도 금전이 오가는 금융 분야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네트워크 안전을 지키는 쪽에서도 금융서비스의 안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부응하는 기술이 바로 ‘사이버 보안’이다. 안전한 디지털 금융 실현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전제조건’이 된다.
또한, ‘클라우드 컴퓨팅’은 핀테크의 금융업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핵심 인프라’다. 클라우드 컴퓨팅의 도입으로, 자체 서버 없이 개인 신용정보 등을 위탁해 저장·관리 할 수 있게 됐다. 향후에도 초기 투자와 유지 비용을 크게 감소시키며 활용이 크게 촉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통신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는 간편결제, 간편송금 등 디지털 금융거래를 작동시키는 공기와 같은 기본요소다. 금융거래의 속도를 뒷받침하며 언제 어디에서나 금융 활동을 가능케 한다.
◇경계 없는 무한경쟁 돌입
세계적으로 디지털 금융 주도권 확보를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빅테크’와 ‘핀테크’, ‘전통금융’ 간 삼각구도 양상이다.
빅테크는 주력인 디지털 서비스 확장을 위해 공격적으로 금융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핀테크의 경우 전통금융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신흥강자로 부상 중이다. 한편, 전통금융업은 디지털 신기술 적용을 통해 혁신을 도모하며 이에 대응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검색·SNS·전자상거래와 같은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형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다. 미국의 아마존·애플, 중국의 알리바바·텐센트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가 금융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들 기업은 디지털 분야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금융에서도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디지털 지급결제, 신용대출, 대안신용평가, 디지털 손해보험 등 다양한 분야로 서비스를 공격적으로 확장 중이다. 향후 빅테크가 금융산업 전반에 미칠 파급력에 귀추가 주목된다.
핀테크 기업은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벤처·스타트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금융권 진입이 용이한 지급결제, 자문 서비스와 같은 전문 분야에서 많이 출현하고 있다.
최근에는 간편결제를 넘어, 금융솔루션, 디지털 자산관리, 주식·대출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를 갖추며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핀테크 기업은 벤처·스타트업이라는 규모의 한계를 딛고, 금융산업 성장의 한 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빅테크와 핀테크의 비약적 도약 속에 전통금융업은 사활(死活)을 걸고 디지털 혁신에 집중한다. 특히, 금융 플랫폼 선점을 두고 빅테크 기업과 피할 수 없는 경쟁에 내몰린 상황이다.
디지털 기술역량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핀테크 기업과의 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핀테크 스타트업을 직접 육성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에 더해, 디지털 자산(STO·NFT 등)과 비금융(헬스케어·모빌리티 등)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새로운 활로도 찾고 있다. 전통금융업은 빅테크와의 금융 패권경쟁의 파고(波高)를 넘어야 한다.
◇극복해야 할 과제
디지털 혁신에 따른 금융 패러다임 전환 과정에서는 기존 금융체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먼저, 빅테크 기업이 금융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향후 플랫폼 서비스의 성장 여부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빅테크 기업이 성장할 때는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네트워크 ‘승수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면 위축될 때에는 참여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구축(驅逐)효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런 변동 가능성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
또, 전반적인 국가 경제 관리체계 측면에서 디지털 금융이 사각지대에 놓일 우려도 있다. 환율, 통화와 같은 금융 정책을 펼침에 있어 빅테크와 핀테크를 포함한 전체적인 관리에는 일부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경제침체와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런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드러날 수 있다. 금융 전반에 대한 조망이 어려우면 위기 극복 해법을 찾는데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한편, 국내 디지털 금융업의 투자는 글로벌 수준에 못 미친다. 특히 핀테크 분야에서 확연하다. 반면, 글로벌 핀테크 기업은 내부 역량확보를 위해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레리니티브, 넷츠와 같은 핀테크 기업은 2021년에 각각 148억 달러, 92억 달러를 자사의 기술 확보, 인프라 확충, 서비스 개발 등에 투자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 대비하지 못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더 나은 발전의 길
결국 미래 디지털 금융 경쟁력은 디지털 신기술이 좌우할 것이다. 지금의 디지털 역량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AI, 블록체인과 같은 디지털 신기술 확보와 인프라 확충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
한편, 자사 금융이용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폐쇄적인 서비스만으로는 성장이 제한된다. 은행, 증권, 카드, 디지털 자산, 핀테크 플랫폼과 같은 다양한 금융 플레이어 간 협력이 요구된다.
나아가, 자동차·의료·통신·쇼핑 등과 연계된 다양한 금융서비스 창출을 위해 비금융 분야와의 협력 또한 확대해야 한다. 모두가 상생하는 개방형 비즈니스 생태계 조성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디지털 서비스에는 국경이 없다. 금융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우리 기업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다. 앞으로는 해외 시장에 적극 나서며 글로벌 디지털 금융시장을 주도해야 한다. 국내를 넘어선, 글로벌 시장을 타겟하는 담대한 도전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낡고 경직된 규제는 디지털 금융 발전과 확장을 가로막는다. 금융서비스 혁신성은 보장하면서 위험은 관리돼야 한다. 치밀하고 유연한 규제체계 정립이 중요하다.
또한 빅테크·핀테크·전통금융업 각자가 처한 여건을 고려해 상호 간 공정경쟁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 마련도 요구된다.
우리나라는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같은 디지털 분야에서 글로벌 강자다. 반면, 금융 분야에서는 세계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제조 중심 ‘실물경제’에서 금융 중심 ‘화폐경제’로 이동했고, 이제는 디지털 중심의 ‘테크경제’로 발전 중이다. 디지털 금융으로의 변화를 반전의 기회를 삼아, 세계 일류 금융 국가로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 esbjun@iitp.kr
〈필자〉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1년 체신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0년 동안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서 두루 요직을 섭력했다. 미래창조과학부에서는 전파정책국장과 대변인, 과기정통부 출범 이후에는 통신정책국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한 정보통신기술 전문가다. 2021년 1월 IITP 원장으로 부임, 30년 동안 축적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ICT 연구개발(R&D)을 진두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