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벤처투자 ‘주마간산’

“한국의 벤처캐피털은 여러개의 액티브 펀드를 동시에 운영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하나의 운용사가 한 번에 하나의 펀드만 운영합니다. 해외 출자자 입장에서는 혼란스럽습니다.”

[ET톡]벤처투자 ‘주마간산’

얼마 전 100여명의 국내외 벤처투자 운용기관과 출자기관이 모인 ‘GVIS 2023’에서 한 외국계 운용사가 꺼낸 말이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과 해외 시장 차이점을 묻는 토론 사회자 질문에 가장 먼저 내놓은 답이었다. 조세 방식 차이와 해외펀드 대비 낮은 수익성 등은 그 다음 문제였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익히 알려진 문제여서다. 수년전부터 한 벤처캐피털(VC)이 벤처펀드 여러개를 운용하는 관행은 국내 벤처투자 시장과 글로벌 시장의 가장 큰 차이로 꼽혀왔기 때문이다. 모르던 문제가 아니다.

문제 개선을 위한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벌써 2년전 정부는 “해외투자자의 국내 벤처펀드 출자가 쉬워집니다”라면서 실리콘밸리식 벤처펀드 지배구조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업무집행전문회사 설립을 허용해 해외 투자자가 국내펀드에 출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장애를 줄이는 것이 핵심 내용으로 담겼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계획은 어느새 잊혔다. 대책을 발표한 부처 내부는 물론이고 업계 관계자 대부분은 그런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자가 언급한 뒤에야 뒤늦게 파악할 정도였다.

이런 대책을 담은 법안은 아직 발의도 되지 않았다. 앞서 발의한 법안에 지나치게 많은 변화가 담기면서 새 법안 추진이 어려웠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정권이 바뀌면서 책임자 공석이 길어진 것 역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벤처펀드 투자목적법인(SPC) 설립, 창업투자회사의 벤처투자회사로 명칭 변경 등을 담은 개정안은 이달이 되어서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대책 발표 및 법안 발의 후 2년만이다. 2년이란 시간이 흘러 법안이 통과됐지만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진 적은 딱히 없었다. ‘지나치게 검토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최종 법안이 통과됐다.

지난 2년간은 그야말로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이다. 벤처투자업계는 세계적인 유동성 증가와 정책성 자금 투입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겪었다. 성숙하는가 싶었던 업계는 그동안의 논의를 모두 뒤로 한 채 성장에만 골몰했다.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것들도 덩달아 뒤로 밀렸다. 다소 늦었지만 지금이 그간 빠르게 달리며 스쳐 지나온 숙제를 풀어야 할 때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