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오래전 중학생 시절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탐독한 때가 있었다. 그중에서 하루에 한번쯤은 하늘을 보라는 이야기와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한다’는 두 가지 명제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명언으로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때’란 말, 즉 타이밍은 모든 인간이나 사회의 활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지 싶다.
사랑고백도 때를 놓치면 애석하게도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 ’겨울나그네’나 ‘건축학개론’에서도 주인공들이 때를 맞추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사랑만이 아니다. 한 국가가 발전하는 역사의 과정에서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이 나타났는지 또한 중요했다. 우리는 구한말 서양문명의 강대한 침투 속에서도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결국 구시대의 체제(성리학이라는 막강하고 견고한 체제)만 고집하다가 근대화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타이밍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은 비단 어떤 작위뿐만 아니라 부작위도 포함하는 의미다. 즉, 어떤 때에 어떤 것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지켜보는 것조차도 때에 맞는 행위에 포함된다.
몇 년 전부터 온라인플랫폼(이하 플랫폼)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증가하더니 급기야 이는 온라인플랫폼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시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국회에는 2023년 5월 기준으로 무려 18개의 플랫폼 규제 법안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필자는 이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왜 플랫폼을 규제해야 하는지, 기존의 규제법 외에 새로운 규제법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인지, 그 방법이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경직된 규제방식이어야 하는지, 그 규제를 정당화하거나 규제 때문에 발생할 부작용에 대해 정확한 조사나 연구가 단단히 밑받침돼 있는지 등을 질문해왔다. 그러나 그 누구로부터도 명쾌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플랫폼은 사실 단순하다. 테크기업이라서 뭔가 대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요체는 공급자와 수요자를 직접 연결시키는 소통의 매개체 또는 전자상거래 중개업체라 할 수 있다. 국내의 네이버와 카카오뿐만 아니라 국외의 구글, 애플, 아마존도 유사속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기업형태가 아니고 이미 20년 이상 우리의 삶속에서 함께 만들고 성장해 온 국민생활서비스다.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길고 복잡한 연결체인을 아주 단순하게 매개하는 것이 플랫폼서비스다. 어떤 사람은 플랫폼에 가격조정력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공급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해 노출되는 플랫폼서비스에서는 말 그대로 시장의 작동 원리에 따라 가격이 형성된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얻는 사회적 후생의 크기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는 것이다.
투명하고 공개된 사회일수록 중간에서 보이지 않게 이익을 취하던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플랫폼 등장 이후 변화를 요구받는 상황을 만난 것뿐이다. 이제 우리 국민은 플랫폼을 통해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정보를 직접습득할 수 있게 됐고, 상품과 서비스를 검색하고 판단해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급자를 기만하고 소비자를 속여 살아남는 플랫폼은 없을 것이다. 어떤 플랫폼에 대한 의심과 실망이 커지게 된다면, 소비자와 공급자는 다른 플랫폼으로 공급과 소비를 옮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서비스가 존재하는 적절한 경쟁 환경은 갈등감소와 소비자후생의 증가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행스럽게 국경 없는 시장 환경 때문에 대부분 영역에서 다양한 국내외 플랫폼과 서비스가 상호경쟁 중에 있다.
그런데도 왜 하필 이때에 플랫폼에 대한 규제론이 우리나라에서 등장했는가. 자국 플랫폼이 거의 없는 EU는 자국 플랫폼을 육성하기 위해 현재 유럽시장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미국의 거대 빅테크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여러 규제시도를 거쳐 최근엔 디지털서비스법(DSA), 디지털시장법(DMA)으로 대표되는 규제로 이어졌다.
미국도 거대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의회에서 여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은 기존법으로 가능한지 재검토하고 플랫폼에 대한 일방규제가 오히려 경제생태계 특히 중소산업 발전에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재고 끝에 보류한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내와 상황이 다른 유럽과 미국의 논의가 (직)수입되면서 플랫폼과 공급자(소상공인, 입점업체)와의 관계는 마치 구조적이고 전반적인 부조리한 형태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바탕으로 급하게 입법화하려는 매우 염려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규제권한을 갖기 위해 정부부처 간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대립하는 경우도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플랫폼 시장 환경은 유럽과 상황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랫폼 규제가 마치 시대의 사명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당장 플랫폼을 규제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묻고 싶다.
소상공인과 갈등이라는 부분은 계약 당시의 설명과 입점업체의 상품 노출순서에 대한 기준이 주가 돼 법안 발의됐으나, 이 부분은 지난 해 여름부터 플랫폼과 중소상공인, 소비자단체들이 대거 참여해 논의한 끝에 자율규제의 형태로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가 5월 발표한 자율규제협약이다.
EU의 입법론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 상황과 다른 바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내용의 타당성을 우리사회가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용의 타당성과 효율성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입법자 스스로도 가지기 어렵다면, 국민에게 법을 강요할 수도 없고 따르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작위가 아닌 부작위 즉 가면히 지켜보는 것이 최선의 입법이고 행정이 될 수 있다.
독과점기업이 고착화되는 것 역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바라는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와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맞지 않는 논의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특정영역에서 특정 플랫폼기업이 과도기적으로 독점상태에 있다면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밀한 독점규제법으로도 충분히 규제가 가능하다.
급하게 서둘러 플랫폼에 대한 규제를 적극 입법화한다면 국내플랫폼 산업의 붕괴를 초래하고 그들과 필연적 연관을 맺고 있는 중소산업, 개발자, 소상공인 나아가 소비자후생까지 모두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때를 알아야 한다. 플랫폼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지금이 입법을 서두를 때인가. 아니면 시장의 상황을 더 파악하고 각계각층의 여러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자정노력에 맡기는 것이 더 국가와 국민에게 좋을 때인가.
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shpark@kinternet.org
〈필자〉박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에서 법학 석사를 취득한 후 네이버에서 대외협력실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컴투스, 게임빌 법무총괄 이사로 지냈다. 2018년에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위원회 규제심사위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지식정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후 원활한 대외 소통을 바탕으로 규제 완화, 글로벌 사업자의 시장 지배력 남용 억제, 인터넷 플랫폼 활성화 도모 등 국내 인터넷산업의 선순환 생태계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회장 shpark@kinternet.org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