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교수의 정보의료·디지털 사피엔스]스몸비, 디지털 좀비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오늘도 서울의 지하철 객실은 스마트폰 좀비인 스몸비들로 가득하다. 처음엔 불쌍한 좀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이들도 곧 전염돼 스몸비로 변신한다. 별 도리가 없다. 한국은 억울한 원한을 풀지 못해 이승을 떠도는 하얀 소복, 풀어헤친 머리, 피 묻은 긴 손톱, ‘귀신’의 나라였다. 누군가 원한을 풀고 저승으로 인도해야 했다. 억울한 원한도 없이 배회하는 시체 좀비는 우리 마음속 ‘귀신’의 공포심을 모두 밀어냈다. 1000만 관객을 모은 ‘부산행’을 시작으로 ‘킹덤’, ‘스위트 홈’, ‘살아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세계적 ‘K-좀비 열풍’이다. 드라큘라와 뱀파이어, 귀신, 마녀와 악귀들을 모두 다 밀어내버린 걸어다니는 시체, 좀비는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찾아와 우리들의 두려움을 사로잡은 것일까?

좀비의 역사는 다른 귀신에 비해 짧다. 1969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처음 영화화됐다. 일부 매니아들만의 관심사가 널리 대중화된 시점이 인구 과밀화와 초연결 정보화 시대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것은 우연일까? 좀비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도 않는다. 좀비는 별 생각이 없다. 원한도 없다. 그냥 쫓아올 뿐. 좀비는 전염된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좀비는 떼로 몰려다니고, 그 수가 많다. 좀비에게 잡힌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나도 좀비가 될 뿐이다. 이제 별 생각 없이 살아도 된다. 어쩌면 영생이다. 어떤 수퍼 좀비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환생하기도 한다. 달아나 볼 수는 있지만 숨을 곳은 없다. 뿌리쳐 볼 수는 있지만 완전히 헤어질 수는 없다. 좀비는 스토커처럼 일방적이고 집요하다.

곧 7월 7석이다. 1년에 단 하루 까마귀와 까치들이 만들어준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다. 애타는 그리움 속에 1년을 기다려야만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애틋한 설정을 신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바다로 고기잡이 간 낭군의 생사를 오매불망 기다리다 돌이 됐다는 바닷가 마을의 망부석을 신세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전화 걸면 되잖아요?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도 있고. 솔직히 만날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전화도 우편도 없던 시절엔 한번 헤어지면 정말 영원한 이별이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산이 막혀, 물이 막혀’ 못 만난다던 거창한 옛 핑계들을 폐기했다. 어물쩍 헤어질 핑계는 이제 없다. ‘그리움’의 애틋한 감정은 폐기됐고 ‘못 헤어짐’이 거칠게 남았다. 이제 의미있는 만남에서 헤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헤어짐을 결심하고 표현하는 길뿐이다.

좀비는 떨쳐내려야 낼 수 없는 내 자신의 그림자다. 몰려오는 좀비는 과도한 연결에 대한 피로감이다. 좀비와는 제대로 만난 적도 없어서 온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 좀비는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생각도 원한도 없이 쫓아올 뿐. 좀비의 무의미한 몸짓 속에서 자신의 공허함을 발견하곤 좀비에게 연민에 빠지거나 좀비를 마구 해치는 이들을 탓하기도 한다. 좀비에게 잡힌다고 죽는 건 아니다. 좀비로 변한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뿐. 먼저 좀비로 변한 옛 친구를 만날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경쟁밖엔 아무것도 없는 좌절과 ‘번아웃’ 세상에서 어쩌면 좀비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괜찮은 삶일 수 있다. ‘이생망’ 어차피 바깥엔 좀비들뿐이다. 언젠가 좀비들의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스몸비는 과밀화와 초연결 세상이 만든 무의미한 좀비 연결의 과부하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연결 회로를 찾으려는 또 하나의 몸짓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모두들 어디론가 달려간다.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 교수·정신과전문의 ju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