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이후 챗GPT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술이나 개념이 소개될 때마다 시장에는 광풍이 몰아친다. 서점에는 관련 서적이 넘쳐나고 각종 미디어는 관련 콘텐츠로 채워진다. 정부는 뒤질세라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쏟아내고 투자 계획을 서둘러 발표한다. 주식 시장에서 관련 종목은 연일 고공 행진을 거듭한다. ‘전문가’가 직업인 전문가 논평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대감을 부채질하면서 신드롬을 만들어낸다. 새로이 소개되는 또다른 기술에 밀려 시장의 관심은 이내 시들해 지고 관련 논의는 진부하게 여겨지기 일쑤다.
신드롬에 편승해 이익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적 접근을 버리고 사회적·경제적 파급효과의 체계적 분석을 기반으로 기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역할도 직접 투자보다는 관련 시장 성장을 위한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물론 기술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민간 투자를 견인하기 위한 정부의 선제 투자도 필요하지만, 시장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법과 제도 정비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정부와 민간의 이러한 노력은 플랫폼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뤄져야 한다. 플랫폼은 현재 시장에서 공급자와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향후 시장은 플랫폼을 통해 완전체로 진화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을 기반으로 진화하는 시장에서 주어진 역할을 중심으로 빅데이터, 인공지능, 블록체인, 메타버스, 양자컴퓨팅 등의 최신 기술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과잉 공급 현상이 일어나고 시장 중심축이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옮겨가면서 소비자는 억눌렸던 욕구를 분출하기 시작한다. 기업은 시장을 지키기 위해 기존 상품에 새로운 기능을 더하면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상품은 복잡해져 가고 복잡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증가한 비용은 상품 가격에 반영돼 소비자 몫이 됐다. 뿐만 아니라 시장에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한 소비자 욕구가 존재한다.
결국 고객별 맞춤식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비자 측면에서는 수많은 상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상품을 손에 넣기도 쉽지 않고 불필요한 비용까지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늘 주어진 선택 속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해야 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이유다.
참여자간 직접적이고 자율적 상호작용을 통해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 플랫폼은 상품을 최소한의 기능을 구현하는 모듈 단위로 쪼개어 상황에 최적화된 조합을 만들어 내면서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해나갈 것이다. 공급자는 모듈 단위로 상품을 개발 생산하고 소비자는 모듈을 선택· 조합해 필요한 상품을 구성할 수 있는 환경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면서, 기업은 추가 비용 발생없이 고객별로 맞춤식 상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을 공급하기 위한 기업의 조직과 기능, 프로세스도 모듈화해 플랫폼을 기반으로 상황에 최적화된 모듈의 조합을 찾아가면서 기업을 경영할 것이다. 더 나아가 경영 활동에 필요한 대부분 자원을 필요할 때마다 외부 플랫폼에서 가져다 쓰면서 고정자산과 고정비용을 줄여 불확실성 시대를 극복해 나갈 것이다. 결국 시장은 거대한 분업 체계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외부 플랫폼에서 필요한 자원을 가져다 쓰는 과정에 발생하는 탐색 비용과 거래 비용이 현저하게 낮아질 때 가능한 시나리오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화하는 인공지능은 플랫폼 참여자가 원하는 조합을 찾아내 추천해줌으로써 시장 거래 비용을 낮춰 갈 것이다.
플랫폼 경제가 암호 화폐의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을 주목하는 또다른 이유는 플랫폼 경제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계약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로 인식되기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쪼개진 것들이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장이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플랫폼 참여자 사이에 발생하는 계약에 대해 건별로 표준 계약서를 만들어내고 위조와 변조가 쉽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면서, 계약과 함께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플랫폼이 상품 시장과 단순 노동 시장에서 그 영역을 복잡 노동 시장으로 확대해가면 블록체인은 더욱 주목 받을 것이다.
가상현실 관련 기술의 대중화 속도가 기대만큼 빠르지 못해 아직 메타버스는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관련 투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메타버스를 플랫폼 시대 주요 소통 공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은 온라인에만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참여자에게 보다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기 위해 대부분 플랫폼은 온라인에 존재할 것이다. 참여자간 상호 작용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비대면으로 발생할 것이다. 비대면 소통은 대면 소통보다 효율적이지만 덜 효과적이다. 플랫폼은 메타버스라는 공간을 통해 비대면 소통의 효율성과 대면 소통 효과성을 동시에 취하면서 플랫폼 참여자간 보다 생산적 상호작용을 지원할 것이다. 현실세계를 가상세계에 옮겨놓은 메타버스는 상황에 최적화된 조합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낮은 비용으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최근 양자 기술은 미래 산업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이론상 슈퍼컴퓨터보다 30조배 이상 빠른 양자컴퓨터의 초고속 연산 능력은 현재 해독 불가능한 모든 암호 체계를 무력화할 만큼 위력적이다. 플랫폼 경제가 양자컴퓨팅에 주목하는 이유는 연산 속도 뿐만은 아니다. 이진법에 기반을 둔 기존 컴퓨터 연산 처리 방법은 0과 1 중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0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있으면 0으로 인식하고 1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있으면 1로 인식한 후에 연산을 수행한다. 양자컴퓨터는 0과 1의 특성을 모두 가질 수 있음을, 그 비중 또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연산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절대적으로 내성적이거나 외향적 성격은 존재할 수 없다. 보다 내성적이거나 외향적 성격이 존재할 뿐이며 그 성격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양자컴퓨팅은 ‘근사해’가 아닌 플랫폼 참여자 요구가 정확하게 반영된 ‘엄밀해’를 구할 수 있다.
조명 밝기를 조절하는 스위치에 비유해 연산 방식을 설명하면, 비트로 연산을 처리하는 기존 컴퓨터는 조명을 켜고 끄는 ON·OFF 스위치처럼 작동하고, 큐비트로 연산을 처리하는 양자컴퓨터는 돌리면서 조명 밝기를 조절하는 로터리 스위치처럼 작동한다. ON·OFF 스위치를 기반으로 조도를 조절하려면 여러 개 스위치를 켜고 끄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로터리 스위치는 하나의 스위치를 돌리면 그만이다. 제한된 숫자의 ON·OFF 스위치로는 정확히 원하는 밝기를 선택하기 쉽지않다 양자컴퓨터와 비교해 현존하는 컴퓨터는 속도가 느리기도 하지만 ‘엄밀해’가 아닌 ‘근사해’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지속적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견인하는 지엽적 변화가 아닌 이러한 기술을 기반으로 플랫폼이 견인하는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기술을 접목해 효율성을 높이는 단편적 접근보다 플랫폼 기반으로 사용자가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최근 기업에서 화두가 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앞서 소개한 기술을 기반으로 구동되는 플랫폼에서 이전에는 물리적 제약 때문에 상상만으로 가능했던 비즈니스 모델을 현실화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급속한 변화 속에서 고객 욕구에 더욱 집중하면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통해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플랫폼 기반 비즈니스 모델이 구현되기에는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다. 모빌리티 수난사에서 보듯 기존 산업을 지켜내기 위한 각종 규제가 플랫폼 산업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산업 사회를 지탱하던 제도로 디지털 기반 플랫폼이 견인하는 새로운 사회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플랫폼 사업자와 기존 사업자간 갈등이 생기면 정부는 사용자 편익은 배제하고 기존 제도 틀 속에서 사안별로 이해관계자간 갈등을 조정하는 데 급급하다.
이러한 정부의 모습을 지켜보면 미국에서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걷던 한 행인이 동전을 떨어뜨리고는 한참을 찾다가 포기한다. 다시 길을 걷다가 불빛이 밝은 길에 접어들자 잠시 전에 잃어버렸던 동전을 불빛 아래서 찾기 시작한다.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익숙한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농담이다. 기술 개발에 대한 선제 투자와 함께 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도 필요하지만, 디지털 기반 플랫폼 경제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h.park@yonsei.ac.kr
〈필자〉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미국 소재 매리마운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연세대 대외협력처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디지털 혁신 전문가로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KBS1라디오 ‘박희준의 성공지도’, KBS1TV ‘미래기획2030’, 매일경제TV ‘박희준의 經을 치다’ 등 다양한 경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인디언의 말타기’, ‘플랫포노베이션하라’ 등의 베스트셀러가 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정부 위원회 활동과 기업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