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기술경쟁 흐름을 살펴보면 반도체 패키지 또는 패키징이라는 키워드를 자주 접하게 된다. 반도체 후공정 주요 산출물인 패키지는 전공정에서 제작된 반도체 소자를 기계적, 열적으로 보호하고 데이터 송수신과 전력 공급을 위해 외부 소자 및 시스템과 연결한다. 특히 파운드리 산업을 중심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게 된 대만 기업의 경쟁력 요인 중 하나로 우수한 패키징 기술력이 거론되면서 반도체 패키징 기술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다.
국내 산업 현장과 학계는 2000년대 이후 미세공정 한계가 예측됨에 따라 패키징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미세공정 수준을 지표로 삼고 무어의 법칙을 따라 반도체 기술 추세를 예측해오던 반도체 기술 로드맵(ITRS)이 2017년 이후 소자 및 시스템 로드맵(IRDS)으로 전환된 것은 반도체 집적회로 공정보다는 칩 연결로 구현되는 시스템 최종 성능지표가 더 중요한 ‘모어 댄 무어’ 시대가 왔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새로운 로드맵에서는 종래 반도체 기술 보조 분야로 인식돼온 패키지 기술 추이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첨단 패키지 시장 규모는 연간 8% 성장률로 2026년에는 47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3D·2.5D, 팬아웃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온 첨단 패키징은 최근 시스템-온-칩(SoC) 수율을 향상시키고 공정 의존도를 줄여 본격적 이종 집적을 가능케 하는 칩렛(chiplet) 기술이 등장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칩렛 기반 시스템에 최적화된 재료와 공정, 연결 구조, 인터페이스 회로 연구개발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UCIe 등 칩렛 기반 설계를 범용화하기 위한 표준 제정 활동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최신 반도체 패키지 기술을 실현하려면 재료공학, 기계공학, 반도체공학 등 다양한 공학 분야 융합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반도체 패키징 요소기술에는 전자파 기술도 포함돼 있다. 주로 통신, 레이다, 안테나 등에 응용되는 전자파 기술이 왜 반도체 패키지에 필요할까. 답은 반도체 소자간 데이터 입출력을 매개하고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패키지 전기적 설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전기적 설계는 단순한 배선설계 정도로 인식됐으나, 데이터 대역폭이 증가하고 저전력 요구 조건이 강화됨에 따라 신호와 전력 노이즈 저감이 필수 설계 목표로 제시됐다. 노이즈 성분이 전자파 기술에서 다뤄온 전송선로 및 공진기 특성에서 비롯되므로, 패키지 전기적 설계에서 전자파에 대한 이해는 필수임을 알 수 있다. 개별 칩 성능이 아무리 향상돼도 패키지 상에서 칩을 연결하는 선로와 전력공급망의 전자파 특성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 성능을 보장할 수 없다.
과거 디지털 설계자에게 패키지에서 신호 전파와 같은 아날로그 특성은 생소했기에, 주로 전파공학 분야 배경과 경험을 갖춘 엔지니어들이 패키지 전기적 설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전담했다. 이후 해당 업무는 반도체 및 시스템 설계에서 신호 무결성(SI)과 전력 무결성(PI)으로 규정되고, 관련 연구 개발이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돼왔다.
국내 기업 및 학계의 경우 고속 인터페이스와 이동통신 하드웨어 설계에 SI·PI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TSV 기반 3차원 집적 등 패키지 기반 시스템 출현과 함께 본격적인 SI·PI 연구 개발이 진행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및 자동차용 반도체 패키지 개발을 위한 SI·PI 엔지니어 수요도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 패키지 복잡한 선로 및 전력분배망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문제를 예측하고 해결하는 패키지 설계 및 SI·PI 엔지니어는 전자파 이론과 이에 기반을 둔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 그리고 반도체 및 시스템 설계 전반에 대한 지식과 실무를 겸비해야 한다.
메모리 미세공정에 집중해 온 국내 반도체 기술 외연을 확장하고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패키징 분야 연구개발과 교육이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 전자파 분야 인재들이 반도체 패키지의 전기적 설계 분야로 진출해 향후 시스템 반도체 설계 도전적 과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동국대학교 교수·한국전자파학회 고속 인터커넥트 및 패키지 연구회 위원장 한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