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홈 비디오 테이프 표준 규격을 두고 소니의 베타맥스와 JVC의 VHS가 각축을 벌였다. 홈 비디오 테이프 출시는 글로벌 기술 표준의 중요성과 기업간 표준 경쟁의 실체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기술적으로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소니는 시장독점을 추구했던 반면 ‘언더독’이었던 JVC는 기술 열위를 극복하기 위해 동종 기업간 연합을 결성했다. 결과는 기술 범용성을 중시한 JVC의 승리였다. 이후 소니 회장은 기술을 배타적으로 운용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인정했다. 이른바 표준 전쟁에서 전략의 중요성을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이 부상할 때 주요국과 기업이 글로벌 표준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기술 패러다임 전환을 앞둔 자동차 산업이 새로운 표준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인류의 삶에 새로운 변곡점이 될 자율주행의 미래가 그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는 시·공간의 효율적 활용과 교통사고율 저감, 도로 정체 개선, 교통약자의 이동성 확보 등 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레벨 4~5 수준 완전자율주행차의 상용화가 기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자동차 업계는 자율주행 기능 고도화를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가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은 자율주행 레벨 2 기술 상용화를 넘어 최근 자율주행 레벨 3 수준 자동차 양산을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는 2021년 9월 독일 연방자동차청(KBA)에서 레벨 3 수준 자율주행이 가능한 ‘드라이브 파일럿(Drive Pilot)’의 공식 인증을 획득, 양산차에 적용했다.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가 레벨 3 고속도로 자율주행 기능인 HDP(Highway Driving Pilot)를 탑재한 제네시스 G90 모델 출시를 위한 검증 및 개발 과정에 있다.
주요국 정부도 자율주행 패권을 꿈꾸며 관련 기반을 소리 없이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자율주행 기술 개발이 치열해짐에 따라 기술 우위 선점과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전략으로 ‘표준’의 역할에 주목했다. 핵심표준을 확보하기 위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국가간 협력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자율주행 선도국 미국은 지난달에 발표한 핵심 및 신흥기술(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에 대한 국가 표준전략 보고서에서 자율주행과 관련된 다양한 미래기술 분야의 집중적인 기술표준 개발과 주요 동맹국들과의 파트너십 확대를 통해 기술적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표준개발 전략을 공개했다. 또, 조기 달성을 위한 방안으로 미국 내 다양한 민간 부문 표준 개발단체(Standards Development Organization)간 협력을 강조했다.
정부도 지난해 9월 자동차 산업 글로벌 3강 전략을 발표하며, 자율주행 및 커넥티드 기반 신산업 창출을 위한 선제적 표준 제정과 규제 개선 등 관련 산업생태계 강화를 위한 지원을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올해 4월에는 국빈 방미 기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의 한미 첨단산업·청정에너지 파트너십 행사를 통해 자율주행을 포함한 첨단산업분야에 대한 기술동맹에 합의하고, 미래지향적 성과 도출을 위한 글로벌 협력을 보다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정부 정책과 한미 기술동맹에 부응해 미국의 대표적 민간 표준 개발단체인 국제자동차기술자협회(SAE International)와 상호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커넥티드 자율주행 자동차 분야 핵심 기술의 공동 표준개발 협력을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어 5월에는 제61차 지능형교통시스템(ISO TC204) 국제표준화 회의에 연계해 개최된 한미 양자 실무회의에서 자율주행차 표준화 로드맵 개발 합의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노력은 기술사항의 보완과 함께 자율주행 차량과 인프라 등에 호환성과 안전성을 부여해 국내 자율주행 산업 기반을 보다 튼튼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율주행을 향한 인류의 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기술의 진화는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첨단 기술의 복합체인 자율주행 산업의 미래는 기술 우위를 선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선 해외 사례처럼 국가간·기업간 긴밀한 연합을 통해 글로벌 표준을 확보하는 전략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 글로벌 표준연합의 상호호혜적 전략적 협력을 위해 정부, 기업, 연구기관이 적극적으로 합심함으로써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인류의 자율주행을 향한 긴 여정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우길 기대해 본다.
나승식 한국자동차연구원장 ssna@katech.re.kr
〈필자〉나승식 원장은 서울 고려고와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정보통신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6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정보통신부 IT중소벤처팀장·지식정보산업과장, 지식경제부 기후변화정책과장·기계항공시스템과장·정보통신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신산업정책단장을 거쳐 국무조정실 산업과학중기정책관, 산업부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 무역투자실장, 통상차관보,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지난해 2월 제12대 한국자동차연구원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