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혁신 나침반] 〈2〉기술안보 시대 과기혁신 역량

성경모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과학기술외교안보연구단장.
성경모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과학기술외교안보연구단장.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제 21조의 국가안보조항을 포함해 다자간 무역체제에서 국가안보에 대한 주장 뿐 아니라 외국인 투자에 대한 통제 강화는 무역과 기술이 점점 더 안보의 요구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경제안보, 즉 경제의 안전을 위해 기술과 인력 등을 통제하는 국가 정책은 영국의 산업화 시기 때부터 존재해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특정 산업부문, 자원 및 기술은 세계패권을 다투는 국가들의 특별한 정치적 관심을 받아왔다.

중국 화웨이 제재를 위해 미국 상무부는 자국 안보 위협을 명분으로 ‘미 연방 수출관리 규정’을 2019년 5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총 세 차례 개정하였다.

유럽의 통신 컨설팅 기업 스트랜드컨설트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프랑스, 영국의 5G 무선 접속망에서 화웨이 등 중국업체들이 공급하는 하드웨어가 각각 59%, 41%, 17%에 달한다. 전문가들 중에는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유럽시장에서 화웨이의 제조업 성장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로 보고 있기도 하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중국 정부가 5G 네트워크 사업에 자국기업 참여를 늘리면서 에릭슨과 노키아의 참여가 제한되자 유럽기업이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럽연합은 미중 간 기술경쟁을 사실상 패권전쟁으로 규정, 양국의 전쟁터가 유럽이 되는 순간 최대의 피해는 유럽이 볼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크게 조성되었다. 이에 이 전쟁의 심판(Referee)으로 포지셔닝하겠다는 전략 아래, 기술·디지털 주권을 새로운 정책도구 개발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EU의 기업에 지속가능성 실사법, EU 배터리법, EU 핵심원자재법, EU 반도체법, EU 디지털 시장법(DMA, Digitial Market Act) 및 디지털서비스법(DSA, Digital Service Act) 등을 통해 유럽 중심의 새로운 규범적 질서를 재편하고자 했다. 이를 바탕으로 Gaia-X, EU 배터리 동맹 등과 같은 신흥기술동맹을 출범시키면서 유럽연합은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외국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전략적인 자원과 기술 등에 대한 접근을 확보함으로써 미중 간 기술패권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공급망 재편 및 새로운 시장 창출을 위한 산업화를 추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술·디지털 주권을 명분으로 유럽연합이 신흥기술 분야의 정책을 수립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주권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핵심적인 신흥기술을 일으킬 산업 정책의 우선순위와 목표를 설정하고 적합한 수단을 설계 및 실행하는 정책적 프레임워크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의 신흥기술동맹도 역내 기술 내재화 목적이 분명 있고 이를 통해 기술지정학적 세(勢)를 키우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은 ‘전략적 개방성’ 전략을 내세우며 비 유럽권 국가들과의 협력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미중 기술패권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신뢰할만한 외부 파트너를 통해 필요시 전략적 자원과 기술 등을 확보함으로써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력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접근역량(capability for access)이 더 중요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중국은 첨단 반도체 없는 AI를 연구중이라고 한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과 달리 국가 자체역량과 자원으로만 신흥기술을 일으키기에는 ‘임계질량(critical mass)’ 차원에서 한계가 있다.

기술안보 시대에서 과학기술역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접근역량 향상이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전환과 녹색전환에 기여하는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흥기술 개발에 있어 해외 선진국과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레버리지 기술을 확보하는 동시에 경쟁우위 유지를 위해 최소한 보호해야할 기술에 대한 분류·관리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연구개발 역량에 대한 자체적인 성찰이 더 필요하다. 그간 연구개발의 수단이 되어온 인력, 국제협력, 국제 표준화로의 정책적 접근방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일례로 한국의 연구개발 역량의 강점을 더 강하게 하는 국제협력 전략과 약점을 보완하는 국제협력 전략은 달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모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과학기술외교안보연구단장 lumilyon2@step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