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7월 15일.
정부는 이날 기존 전자산업육성계획을 전면 재조정한 전자공업육성계획을 확정했다.
세계적인 전자공업 기술국가로 발전해 제2 경제 도약을 이룩하겠다는 5공화국의 야심 한 미래 청사진이었다.
이 육성계획은 시작부터 기존 방식과는 달랐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입안을 주도했다. 그러나 청와대 단독이 아닌 관련 부처와 산업계, 연구소 등 핵심 인재 등이 참여한 작업반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 육성안을 확정했다. 특히 기업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민간의 의견을 최대한 정책에 반영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선진국들이 독점하는 반도체, 컴퓨터, 전화교환기 등을 3대 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집중 개발하겠다는 점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와 통신혁명을 이룩한 전화교환기, 정보화 시대 핵심인 컴퓨터 산업 등이다.
1980년 12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전자공업육성 장기정책을 재수립키로 결정했다.
당시 정부는 국가 주력 산업으로 기계공업, 중화학공업, 전자공업을 육성키로 했다. 그러나 전자공업 투자액은 전체의 5%에 불과했다. 전자산업 육성을 위해 궤도 수정이 대폭 필요했다.
전자산업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12월 15일 전자산업진흥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체계적인 전자산업 진흥을 위해 전자산업의 대부로 불리는 김완희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전자신문 창간 발행인)를 1967년 9월 4일 한국으로 초청했다. 김 박사는 그해 9월 16일 전자산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를 박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김 박사에게 “구체적인 전자산업 진흥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박사는 8개월여의 작업 끝에 1968년 5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박 대통령은 1968년 12월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했고, 1969년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김 박사는 이후 상공부, 과학기술처 등 전자산업정책 입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 박사는 1979년 컬럼비아대 종신 교수직을 버리고 귀국,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으로서 전자산업육성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동안의 전자산업 육성 과정이다.
5공화국 들어 전두환 대통령도 전자산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80년 12월 7일 오전 8시 30분. 전두환 대통령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에서 열린 1980년 한국전자전에 참석, 개막 테이프를 끊고 1시간 20여분 동안 전시 제품들을 돌아보았다.
전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완회 회장으로부터 국내 전자산업 현황을 보고받고 “각종 전자 제품의 성능 향상에 더욱 노력해서 국산 전자제품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려 수출 증대에도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경제학자들의 중론은 기술개발 속도가 빠르고 수명이 짧아 우리 같은 후진국에서는 전자산업육성책이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경제수석실이 산업별 산업동향, 생산성, 성장속도 등을 항목별로 비교한 연구 결과와는 차이가 있었다. 연구 결과 1986년이면 전자산업 규모가 기계산업과 맞먹고 1990년 이전에 우리나라 최대 산업인 섬유산업보다 앞설 것으로 예측했다. 한국경제를 이끌 새 성장동력이 바로 전자공업이었다.
오명 당시 경제수석실 경제비서관의 회고록 증언. “컬러 TV방송에 이어 나는 전자공업 육성 장기정책을 입안하기로 했다. 청와대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공부·기획재정부·재무부·체신부·과학기술처 등 모든 관련 부처와 산업계·연구소 핵심 인재 등 28명이 참여하는 팀 프로젝트로 추진하기로 했다. 고작 5~10년이 아니라 앞으로 20~30년 동안 우리나라가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사느냐가 달려 있는 과제였다.”(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홍성원 당시 경제수석실 연구관의 생전 회고. “당시 제5차 5개년 계획을 보면 국가 주력산업으로 기계공업, 중화학공업, 전자공업을 육성한다고 했지만 실제 전체 5%만 전자공업에 투자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전자공업 장기정책을 수립한 것입니다.”
이 작업의 조정과 지원은 당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 오명 비서관, 홍성원 연구관, 정홍식 행정관이 실무를 담당했다.
육성계획안은 해당 부처 실무자와 산업체, 연구소 전문가 등으로 구성한 작업반에서 만들었다. 작업반장은 이동훈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장, 실무총괄은 최성규 상공부 전자기기과장이 맡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안병달 상공예산담당관과 변형 재무부 관세조정과장, 장기훈 과학기술처 정보산업과장, 박창현 체신부 기술과장 등 관련 부처 서기관 및 민병준 금성반도체(현 SK하이닉스) 전무, 윤정우 아남산업(현 DB하이텍) 상무, 손욱 삼성전자 부장, 남궁용식 삼화콘덴서 공장장, 유영준 산업연구원(KIET) 책임연구원, 심장섭 한국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이사 등이 참여했다. 업계 측 인사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1980년 12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전자공업의 미래 청사진과 그 실현 방안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작업반은 분야별 방안을 마련한 후 이를 종합하는 형식으로 청사진을 마련했다. 분야별 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대안을 제시해 서로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최적의 육성안을 모색했다. 작업반원은 똑같은 발언권을 행사했다.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의 말. “당시 작업반은 대통령이 직접 지급한 30만원의 작업보조비만 가지고 열과 성을 다해 작업에 임했어요. 추운 겨울 3개월 동안 작업반은 1980년대 전자산업의 청사진과 그 실현방안을 제시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작업반에 참여한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장(당시 삼성전자 기획실 부장)의 말. “당시 실무작업은 주로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여관에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작업반의 실무지원은 박재인 당시 한국전자공업진흥회 부장이 맡았습니다. 저는 그 무렵 삼성전자 기획실 부장으로서 1년여에 걸쳐 삼성전자 10년 비전을 만들었습니다. 세계 경쟁업체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하고 그 자료를 토대로 비전안을 만들었는데 마침 정부에서 파견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작업반에 참여했습니다.”
작업반이 마련한 전자공업육성계획의 기본방향은 △전자공업을 전략 산업화하고 △장기 목표를 설정하며 △국가 이익에 부합한 방향으로 업계 참여를 유도하고 △설비 투자와 병행해 연구개발을 진행키로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환기를 3대 전략 산업으로 집중 육성하고 △가전 위주에서 산업기기로 생산 구조를 전환하며 △5년 이내에 전자 부문의 생산과 수출을 2.5배 늘려 전자산업을 기계산업과 맞먹은 주력산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또 정부와 민간공동 개발체제를 구축하고 △국책기술 개발사업제도를 도입하며, 대상은 반도체·컴퓨터·전자교환기 등 핵심기술로 정했다. 이 개발 사업은 장단기 과제화하고 민간에 대한 기술개발지원을 강화, 투자 세액 공제나 기자재 도입 시 관세를 감면키로 했다.
정부는 전자공업육성기금으로 1986년까지 모두 1500억원을 조성키로 하고 이를 위해 1982년 정부 예산에서 100억원을 우선 출자하기로 했다.
정부는 부품·소재 공급 능력을 확대하고, 산업용 기기의 국산화를 촉진키로 했다.
정부는 전자공업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 특별소비세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키로 했다.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의 말. “특히 컬러TV는 보석보다도 많은 세금을 냈다. 나는 이승윤 당시 재무부 장관을 찾아가 전자산업 육성의 필요성과 컬러TV 세율 인하가 왜 시급한지 설명했다. 새로 개발하는 컬러TV와 VCR 등 모든 전자제품에 대해 2년 동안 특소세를 면제하고, 그다음 2년 동안은 세금을 단계별로 높이자는 합의를 끌어냈다.”
이렇게 만든 육성계획안은 1981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여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과학기술처 등 관계 부처 실무자와 장관의 협조 및 조정 과정을 거쳤다. 국무총리 결재를 받아 그해 7월 15일 전두환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아 정부 정책으로 확정, 시행했다.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의 증언. “이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정보통신산업과 전자산업의 방향을 정리한 획기적인 정책안이었다. 이 정책은 그후 10년 동안 일관성 있게 추진했고, 1986년 전자산업은 예측대로 수출 100억달러를 기록하며 우리나라가 전자대국으로 도약하는 동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30년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이 육성계획으로 반도체·컴퓨터·전자교환기는 우리나라 신성장 동력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었고, 오늘날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의 원동력이 됐다. 과학기술 자립과 경제 도약을 위한 청와대의 갈증이 이룬 정책 쾌거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