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분쟁으로부터 시작된 기술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 공급망 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포스트 코로나, 챗GPT로 인한 인공지능(AI)의 급격한 확산 등 세계 정치·경제적 구조 변화도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술주도권 확보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기술패권 경쟁시대에는 기술주도권보다 국가 ‘주권’에 빗대 ‘기술주권’이라는 용어 사용도 빈번해지고 있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전략기술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기술주권 확보를 위해 정책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가전략기술 육성방안’의 12대 국가전략기술, ‘대한민국 디지털 전략’의 6대 디지털 혁신기술, ‘신성장 4.0전략’의 15대 프로젝트 등이 있다.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 최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또한 이런 정책적 흐름에 함께하고 있다. ETRI는 12대 국가전략기술과 6대 디지털 혁신기술 관련해 3월 AI, 시스템반도체, 차세대통신, 메타버스, 컴퓨팅 인프라 등 국가전략기술과 연계한 연구개발(R&D) 추진으로 주요 전략기술을 선도적으로 확보하고자 새로운 경영목표를 수립하고 연구조직을 재편한 바 있다.
국가적 기술주권 확보 노력과 관련해 중요한 점은 기술주권 확보를 위해 국가적으로 투자를 추진하는 곳이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일본 등 주요국 또한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기술별 R&D 투자를 확대하고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등 기술패권 경쟁은 앞으로도 심화할 전망이다.
◇임무중심형 R&D의 필요성
기술패권 경쟁으로 인한 미래의 잠재적 불확실성, 경제적 저성장 위기에 빠져있는 우리나라가 독자적 기술주권을 확보해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이 앞선다. 단순하게 해답을 찾아본다면 R&D 양과 질을 늘리면 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문제는 그리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선, 우리나라 R&D 양적 부문에 대해 살펴보자.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R&D 투자는 1.09%로 세계 1위다. 기업 등을 포함해 영역을 전체로 넓히면, GDP 대비 전체 R&D 투자는 4.64%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GDP 비중이 아닌 R&D 절대 규모로 보면 OECD 국가중 세계 5위 수준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GDP 규모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세계적 R&D 양적 투자 규모는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충분해보일 수 있지만 미·중·일 등 주요 강대국은 경제 규모 자체가 거대하기에 절대적 R&D 예산 규모로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다.
R&D 양적 투입량 확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질적 성장이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전략이라 보여진다. R&D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학기술 분야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특정 기술분야를 전략적으로 선택해 후발국의 빠른 추격이 어렵도록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 집중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R&D 역량을 집중하려면 구체적이며 우선시될 수 있는 상위목표가 있어야 한다. ‘임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적 임무가 중심이 돼 R&D 역량을 집중한다면 우리나라가 기술패권 경쟁시대에도 미래 기술주권의 선제적 확보가 가능해질 것이다. 구체적 목표와 달성시한을 가지고 R&D를 추진하는 방식의 임무중심형 R&D를 통해 기술주권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당면한 우리나라 위기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임무중심 6대 중점전략기술 추진
국가 당면 도전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ETRI는 지난달, ‘임무중심형 R&D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ETRI는 국가와 사회의 디지털 혁신을 위해 추진할 6대 중점전략기술을 선정해 주어진 임무를 기한 내 달성하는 R&D를 본격 추진한다. 6대 중점전략기술은 △AI반도체·컴퓨팅 △보안기술 △AI/소프트웨어(SW) △6세대(6G) 통신 △메타버스 △디지털융합기술 등이다.
임무중심형 R&D는 R&D의 질적 성장에 유효한 전략이다. 또 지난해 10월, 정부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를 통해 발표한 ‘임무중심 R&D 혁신체계 구축방안’ 정책과도 맥을 같이하는 전략이다.임무중심 R&D 혁신체계 구축방안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중점기술을 도출하고, 기술별 구체적 목표와 시한을 담은 R&D 전략 로드맵을 수립하는 정책이다. ETRI가 추진하는 임무중심형 R&D 혁신도 동일한 맥락이다. 연구원은 국가적 임무를 중심으로 세계 탑티어급 도전적인 연구목표와 시한을 정하고, 원장과 연구소장이 성과창출의 직접적인 책임을 맡는 ‘ETRI 톱 챌린지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정부 및 외부 전문가와 지속적 소통을 통해 국가대표급 성과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ETRI는 그동안 연구과제 수주 기반 예산 시스템(PBS)의 한계로 연구역량을 결집하지 못하고 기관 연구성과가 파편화됐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번에 마련한 임무중심형 R&D 혁신으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자는 의지도 담겨있다.
우선, AI반도체·컴퓨팅분야 기술에서는 해외 대기업이 선점한 대규모 AI 반도체 시장에 진입, 국가전략산업인 반도체 기술의 혁신을 이끌 계획이다. 우리 기술로 만든 AI 반도체·컴퓨터로 1초에 1000조 회 부동소수점 연산처리 속도인 페타플롭스급 AI 프로세스-인-메모리(PIM) 반도체 기술 개발을 추진한다. 보안기술 부문에서는 ‘범죄 재범징후 예측부터 메타버스 보안까지 안전한 국민생활에 기여’로 잡았다. 영상보안기술 및 메타버스 인증 솔루션을 개발해 영상보안기술로 치안관리와 메타버스 생태계 보안성을 강화하고 국민 안전과 보안 제고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AI/SW분야에서는 ‘내 삶과 함께하는 지능형·교감형 휴머노이드 로봇 및 AI 전문비서 제공’을 임무로 한다. 멀티모달 교감형 AI 기술개발로 사람 친화적 서비스를 제공해 다가오는 저출산·고령화 시대 사회문제 해결형 서비스로 확대해가고자 한다. 6G 통신에서는 지상과 위성망을 통합해 음영지역 없는 안정적 초광역 6G 서비스 조기 상용화를 위한 핵심기술표준 선점 및 산업화를 견인하는 것이 주된 연구목표다. 6G 시장 주도권을 확보해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차세대통신 산업화를 견인하고자 한다.
아울러, 메타버스는 ‘초실감 메타버스로 문턱없는 교육·훈련, 평등한 의료, 실감 엔터테인먼트, 효율적 제조·생산·비즈니스 구현’이 임무다. 세계 최고 실·가상 융합 입체영상 메타버스 기술 개발로 메타버스라는 신산업 생태계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디지털융합기술에서는 첨단 모빌리티와 ICT 헬스케어 분야를 집중 연구한다. 첨단 모빌리티에서는 ‘대한민국 고질적인 교통혼잡 문제 해소 및 첨단 이동환경 제공’이라는 임무를 갖고 미래 에어 모빌리티 플랫폼(AdAM-P) 개발에 매진한다. ICT 헬스케어는 ‘손쉬운 생활 속 혈당관리로 극복하는 당뇨, 광스캔 한번으로 진단하는 암’을 연구하기로 했다. 비침습·무채혈 연속 혈당측정 기술과 종양 실시간 정밀진단 라만 분자 내시경 개발을 추진해 병마와 싸우는 수많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기술을 개발한다.
◇임무중심 R&D 혁신으로 국가적 난제를 돌파
ETRI를 비롯한 과학기술 분야 25개 출연연은 PBS 체계로 연구의 상당 부분이 운영되고 있다. 각 개인이 급여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인건비는 외부로부터 연구과제를 수주해 충당하는 구조다. PBS 체계는 R&D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에 따라 1996년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이런 체계는 출연연 연구자들이 수요중심 R&D를 추진하게 유도한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이 연구과제 요구와 목표만 만족시키는 환경을 조성해 정작 연구자가 소속된 연구기관 목표와 전략에 부응하기가 어려운 구조란 단점이 있다.
이런 기존 연구과제와 수요중심 R&D는 연구역량 결집과 통합적 성과창출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PBS 체계 한계를 극복하고자 임무중심 R&D 혁신으로 돌파구를 마련코자 한다. 아울러 연구원은 기존 수요중심 R&D와 임무중심 R&D의 균형을 이룰 방침이다. 이로써 R&D 유형의 장·단점을 흡수하는 상보작용으로 시너지를 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대표 출연연 ETRI는 명확한 상위목표와 달성시한을 갖추는 임무중심형 R&D로 연구역량을 결집하고 주요 ICT 전략기술 영역에서 초격차 핵심원천기술을 확보하고자 한다.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과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처한 우리나라의 위기와 난제를 ICT 전략기술을 발판으로 정면 돌파하고자 한다. 이로써 국가 혁신성장 동력을 확충할 수 있도록 힘차게 선도할 예정이다.
방승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scbang@etri.re.kr
〈필자〉 방승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전자공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ETRI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해 무선전송연구부장, 미래기술연구본부장, 통신미디어연구소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말 원장에 취임했다. 그동안 디지털신호처리, 이동통신 등 분야에서 다수의 SCI급 논문을 발표하고 1400건 가까운 국내외 특허 출원, 700건이 넘는 특허 등록 실적을 거뒀다. 2006년에는 국무총리표창, 2014년에는 한국공학상, 2021년에는 해동기술대상을 받았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는 한국통신학회와 한국전자파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