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패권경쟁이 심화되던 2020년 1월, 중국 천인계획에 참여하며 미국 연방정부의 연구개발사업으로 얻은 연구결과를 중국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하버드대 화학·생물학과장 찰스 리버 교수가 체포됐다. 리버 교수는 노벨상 후보자로 언급될 만큼 나노·화학 연구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였다. 사건은 세계 과학계에 큰 충격이었다. 이후 우수한 과학자를 많이 보유한 선진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유사 사건 발생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냉전 종식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화됐던 글로벌화·개방화·국제협력 활성화를 핵심 가치로 하는 글로벌 연구생태계에 경고등이 켜지게 된 것이다.
국가·경제안보에 직결되는 기술경쟁과 과학기술 안보화 논의는 최근 새롭게 등장한 이슈는 아니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고조됐던 1980년대 초, 미국 연방정부는 군용기술이 미국 대학캠퍼스를 거점으로 소련으로 유출되는 것을 주시했고 과학연구정보의 흐름에 대한 정부의 통제 필요성을 심도 있게 고려하며 현재와 비슷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었다. 이에 국가가 안보 명목으로 연구 활동에 간섭하는 것은 연구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연구계의 우려 목소리도 지금과 비슷하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국방기술 탈취를 목적으로 전문 스파이를 고용해 대학 캠퍼스에 포진시켰다면, 최근 문제가 되는 사례는 일반 연구자들의 일상적인 국제협력 활동을 매개로 연구에 간섭하거나 원하는 연구정보를 부적절하게 탈취한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그 과정에서 연구자는 전문연구자로서 당연히 지켜야하는 연구진실성을 위반하도록 유도되거나 강요받게 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연구안보 논의 핵심은 연구성과물의 보안 뿐만 아니라 자국의 연구자 보호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기술경쟁의 거센 파고속에 과학기술은 국가·경제안보의 핵심에 놓이게 되었고 연구안보는 민군겸용기술과 첨단전략기술 유출 단속뿐만 아니라, 기초·원천연구 분야의 통상적 연구 활동에서도 연구자가 안전하고 투명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연구생태계를 조성·유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자는 강화된 연구진실성 규범 준수와 국제연구협력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이해충돌 및 안보적 피해 잠재성에 대해 미리 보고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연구안보 위험 완화와 관련된 모든 의무 준수와 문제발생시 책임을 개인 연구자에게만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고 결코 건전한 연구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 따라서 해외 주요국 정부와 연구기관은 연구자 보호를 위해 국제협력 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미리 알리고 안전한 연구 협력을 위해 다양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 혁신기술 탄생은 과학기술의 전 주기에 걸쳐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국제 협력과 교류를 통해 가능해 진다.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과학지식과 기술에 기반해 혁신이 탄생하는 것이며, 새로운 과학지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세계 연구자들의 철저한 동료평가 검증 단계와 지속적인 인용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혁신국가라 할지라도 과학기술연구의 전 주기를 한 국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정학적 대립과 첨예한 기술경쟁으로 과학기술의 안보화가 심화되더라도, 글로벌 연구생태계 구성원의 협력없이는 과학기술은 증진될 수 없다는 의미다. 결국 국제협력으로 발생된 연구안보 위험도 한 국가의 노력으로만 해결되지 못하며, 공동의 국제협력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은 한때 지식과 기술이 전무했고, 연구시설이 없고, 연구에 투자할 재원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협력을 통해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았고, 연구소를 세웠으며 과학기술 생태계의 기반을 다졌다. 우리의 유일한 자산이던 인력들은 전문 지식과 뛰어난 기술역량으로 다져진 우수 과학기술인력으로 거듭났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자타공인 과학기술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했다. 과학기술계의 인력 교류와 국제협력은 한 국가의 운명을 눈부시게 탈바꿈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협력의 수혜자였던 한국의 과학기술이 글로벌 연구생태계의 자율성, 개방성, 신뢰성 증진에 기여해 국제협력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더 많은 수혜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국가안보와 연구자율성, 연구안보와 국제협력을 더 이상 상반되는 가치로 인식할 것이 아니다. 정부와 연구기관은 연구자 보호와 연구사업의 위기관리를 체계화하고, 연구자는 보다 책임있게 연구진실성을 준수함으로써,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지킬 것은 지키고 해야 할 역할을 묵묵히 해나가는 건전한 연구생태계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선인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지속가능혁신정책연구단장 isun@step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