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로맹가리의 단편 '벽 - 짧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보자.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는 청년이 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옆집 처녀를 사랑했다. 거절당할까 두려워 말 한번 건네지 못했다. 여느 때와 같은 크리스마스 연말 늦은 밤. 침대에 지친 몸을 눕힌 그에게 옆집 소리가 들려왔다. 남녀의 것으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 침대의 삐걱거림 등 누가 들어도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노와 경멸로 그녀를 저주하는 유서를 남겼다. 영혼이 떠난 그의 몸은 집주인이 발견했다. 경찰과 동행한 의사는 그의 방을 나오며 옆집 처녀에게 들렀다. 그녀가 옆집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의사가 마주친 미모의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죽어 있었다. 독극물을 먹은 탓에 고통스런 마지막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다. 옆집 청년과 다를 것 없는 유서를 남겼다. 자신을 사랑한 청년의 존재를 알았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아날로그 시대의 단절이 가져오는 극단의 불안, 고독과 공포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디지털 시대는 어떨까. 2000년대 인터넷, 2010년대 스마트폰을 거쳐 2020년대 AI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SNS 등을 통해 끊임없이 소통하는 시대다. 디지털은 언제 어디서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 생면부지의 누구와도 대화한다. 아날로그적 단절을 끝내는 소통 장치다. 정말 그럴까.
디지털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휴대폰을 안고 산다. 기술 문명을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불안, 고독과 공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디지털 세대는 열심히 하면 성공했던 기성세대의 자녀로 태어났다. 돈을 들여 많은 경험을 했다.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저성장의 늪에 빠져 미래로 갈수록 나을 것이 없다. 화려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에선 나 말고 모두 잘난 사람이다. 나만 고립되고 실패를 거듭하는 것 같다. 속마음을 건네는 진정한 소통은 사라진다.
AI 등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소외도 문제다. 인간은 의식주를 갖추는 것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능력을 강화해 왔다. 신체 능력의 한계를 도구, 기계, 컴퓨터, 스마트폰, 소프트웨어 등 외연을 확장해 극복했다. 과학기술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통제하며 삶을 지켰다. 그런데 AI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모방, 대체한다. 기계와 달리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내놓고 과정도 통제하기 쉽지 않다. 반면에 사용자가 AI를 다루려면 전원을 켜고 로그인 하면 충분하고 클릭 몇 번으로 해결된다. 기술, 재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동법이 갈수록 쉬워지고 사람의 역할은 줄고 있다. 거기서 소외가 싹튼다. AI는 끊임없이 데이터를 요구한다. 데이터를 줄 수 밖에 없는 인간은 불안하다.
과학기술 발전은 큰 틀에서 인간의 진화이지만 개개인을 보면 그렇지 않다. 단순한 소비자로 내려앉고 일자리를 뺏기는 등 소외된다. 그 불안을 디지털 세대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디지털 발전은 처음엔 혜택을 주고 인간의 불안을 줄여나간다. 그러나 일정 궤도에 오르면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숨은 단절'을 키운다. 불안을 급격하게 높이고 급기야 공포에 이른다. 불안과 공포는 또다시 거짓 소통을 양산하고 악순환을 이룬다.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단팥빵 가게를 하는 전과자와 팥소를 만드는 나병 할머니 이야기다. 세상의 편견은 그들을 갈라놓지만 그것조차 받아들인다. “잘못이 없어도 짓밟힐 수 있지. 우리는 세상을 보고 듣기 위해 태어났어. 무언가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지.” AI시대라고 다를 것이 없다. 존중하고 배려해야 숨은 단절을 끝낼 수 있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