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시행이 확정되고 준비과정 단계인 지금, 학교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에듀플러스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와 선도학교로 지정된 이후 조용한 교육 혁신을 일궈 나가고 있는 제주 대정고와 서울 청원여고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전히 고교학점제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학교와 학생, 교사들은 고교학점제 도입을 준비하면서 변화의 모습을 체감한다.
◇학생 수준별 맞춤 선택수업 도입·학생 진학에도 도움
제주 서귀포시 대정고는 2학기가 시작되면 3학년 교실 한켠에서 커피 향이 진동한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커피콩을 만지고 직접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2018년 고교학점제 연구학교·2021년 선도학교에 선정된 대정고는 3학년 진로 선택과목 가운데 하나로 '바리스타' 과목을 개설했다. 학생들 반응은 뜨겁다. 매년 과목 신청 학생 수가 인원을 초과해 '지원동기'를 바탕으로 학생을 선발할 정도다.
수업은 일반 교실의 0.7배 크기의 다과목 가변형 교실에서 열린다. 책·걸상이 놓여 있던 자리는 외부에서 대여한 에스프레소 머신이 자리했다. 외부 바리스타 강사가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한다. 출결 관리와 학생부 기록 등은 학교 자체 내 협력 교사가 맡는다.
대정고는 바리스타 과목 외 기초촬영(사진), 논리학, 심리학 등 97개 과목을 개설해 운영한다.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이전에는 43개 과목이 개설됐던 것과 비교하면 과목 수가 2배 이상 많아졌다. 선택 교과가 다양해지면서 수업을 듣는 학생 인원 수가 줄어든 점도 장점이다. 교사 당 학생 수가 줄면서 학생 개별 맞춤 학습지원이 가능하게 됐다.
전교생이 300여 명에 불과한 농어촌 소규모 학교인 대정고는 선택과목을 다양하게 개설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소규모 학교는 고교학점제가 이뤄질 수 없다는 편견도 작용했다. 그러나 대정고 교사들은 300명의 학생에게 300개의 교육과정을 운영한다는 마음으로 선택과목을 개설했다. 내신 등급별로 학생들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수업도 마련했다. 상위권 학생을 위해 특목고에서 운영하는 지구과학·물리학 실험 과목을 개설했다. 다양한 진로를 탐색하는 진로 실습 과목도 신설했다. 바리스타 과목은 학생이 원하면 자격증 이수도 가능하다.
대정고는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를 준비하면서 제도 안착을 위한 운영 원칙, 교육과정 규정 등을 만드는데 공을 들였다. 강희진 대정고 교사는 “과목 당 학생 수, 과목 선택과 변경 기간 등 학생 민원이 생길 수 있는 부분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준비했다”며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자기 주도성 기반 진로 설계 교육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진로학습 교육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학교의 노력은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진로 설계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 가운데 진로 선택뿐 아니라, 대학 입학 후 학업 성취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사례가 나왔다. 대정고 졸업 후 경희대 소프트웨어(SW)학부에 진학한 A군은 2·3학년 당시 '정보과학'과 '자료구조' 과목을 선택해 수강한 뒤 복합적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알고리즘 통해 구조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A군은 “학교 내에서 컴퓨터 동아리 활동, 다양한 실습 등을 통해 프로그래밍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현재 대학에서 진행하는 SW개발 프로젝트에도 활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정고 교사들은 고교학점제의 긍정적 측면으로 학생들이 흥미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배우면서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이 늘었다는 점을 꼽았다.
◇빈 학교 공간, 학생들의 무대가 되다
서울 청원여고의 건물 출입구 현관은 여느 학교와 다르다. 학생회 주최로 '쇼미더피아노' 같은 피아노 공연이 열리는가 하면,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는 스터디 카페가 되기도 한다. 청원여고가 공간 재구조화 사업을 통해 '아름뜨락'이라는 이름을 내건 공간을 조성한 이후 학교 현관은 마치 학생들의 무대처럼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한다.
고교학점제 연구학교에 참여한 뒤 청원여고의 변화된 모습 중 하나다. 이동 수업이 잦은 3학년 학생들이 개인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홈베이스도 설치했다. 배우는 과목, 공간 등이 획일화돼 있던 학교 현장이 새롭게 탈바꿈 한 것이다.
김지원 청원여고 3학년 학생은 “학교 내 가장 큰 변화는 다목적교실이 늘어난 점”이라며 “중학교 때까지는 고정된 틀이 있는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이제는 교과목 특성에 맞춘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 좋다”고 말했다.
2020년에 고교학점제 선도학교로 선정된 청원여고는 전면 개방형 교육과정을 도입해 학생 개인별 시간표 배부, 학교간 협력 교육과정인 공유캠퍼스 운영, 공통과목(국·영·수) 최소 성취수준 보장 지도, 학생의 진로·적성, 학습 수준에 맞는 자율적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김미선 청원여고 교사는 “1·2학년 전체 학생 대상으로 진학·진로 희망조사를 진행해 부족한 교과목을 학교 교육과정위원회에서 논의하는 등 전면 개방형 교육과정으로 만들었다”며 “이는 과목이 미개설 됐거나 신청에 제약이 있어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의 과목 선택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은 청원여고의 강점 중 하나다. 교사는 학생이 과목을 선택할 때 진로와 흥미에 맞는 과목을 신청하도록 조력자 역할을 맡는다. 청원여고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을 돕기 위한 방안으로 조회시간을 이용해 선택과목 교사가 만든 각 과목에 대한 설명 영상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기말고사 이후 진행되는 학교 자율적 교육과정도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다. 학생들이 여러 과목을 융합한 다양한 주제에 관해 자유롭게 탐구한 뒤 탐구보고서를 제출한다. 탐구 범위에 제한이 없어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다.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도 마련된다.
김드보라 청원여고(2학년) 학생은 “요즘은 융합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과목을 융합해 공부하는 시간은 학생들 진로탐구 분야에 도움이 된다”고 긍정 평가했다.
◇고교학점제 준비기간…교사 인력풀 등 개선점 마련해야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과목이 늘면서 다과목 수업을 맡아야 하는 교사들 고충이 는다는 점은 짚어봐야 할 과제다. 교사의 담당 과목과 수업 시수 불균형, 업무 과중, 교사 부족 등이 대표적이다. 대다수 교사가 고교학점제 도입시 개선해야 할 부분 중 하나로 교사 인력풀 문제를 꼽는다. 외부 강사 채용시 교육부·교육청 등에서 강사 인력풀을 확보해 각 학교에 제공하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양한 과목의 전문 강사를 일일이 학교에서 채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강희진 대정고 교사는 “많은 학교 현장에서 외부 강사 채용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며 “선택과목의 경우 한 지역 학교를 동시에 맡아 수업을 진행하는 순회 교사 제도 마련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미선 청원여고 교사는 “고교학점제 시행과 동시에 학교의 질 높은 교육이 담보되기 위해 교사들의 다과목 지도 수업 연구 시간 확보가 시급하다”며 “안정적인 교원 수급, 담임처우 개선 등 현실적인 대안 마련이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교학점제의 선순환이 이뤄지기 위해 중학교 교사 연수도 강화할 부분이다. 최근 중학교 학부모, 중학교 교사 등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관심을 갖고 지역 내 고등학교에 상담, 연수 등 문의를 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다.
고교학점제가 시행 취지대로 학교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 학교 교육 과정이 대학 진학을 위한 과목 이수 경로 안내로만 그쳐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공계 대학에 대한 학생들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인문계열 선택 과목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임유원 석관고 교장은 “작년부터 서울대를 비롯한 중상위권 대학이 전공 분야별 이수 권장 필수 과목들을 제시하면서 학교의 선택과목 안내 방향이 자연계열 중심으로 수학, 과학 등 과목을 우선적으로 이수하도록 하는 분위기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고교학점제가 학생의 과목 이수 경로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면 고등학교 교육이 여전히 대학 요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마송은 기자 runni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