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출이냐, 포기냐”
호암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을 놓고 1년여 장고(長考)를 거듭했다.
1983년 2월 8일 오전 일본 도쿄 오쿠라호텔. 일본에 머물던 이 회장은 마침내 반도체 사업 투자를 결단했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미래를 내다본 이 회장의 결단은 담대했고 삼성의 미래를 환하게 밝힌 절묘한 한 수였다.
이 회장은 이날 곧바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홍 회장은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건희 당시 삼성 부회장의 장인이었다.
홍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겁니다. 3월 15일을 기해 삼성은 VLSI(초고밀도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내외에 공포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삼성 반도체 신화의 화려한 서막이었다.
이병철 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
“1983년 2월 도쿄에서 최종 마무리를 서두르고 드디어 반도체 투자의 단안을 내렸다. 그해 3월 15일을 기해 삼성은 VLSI 사업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로 통보하고 이를 내외에 공식으로 선언했다. 삼성 반도체로서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할 것이다. 1년여에 걸쳐 철저한 기초 조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연구와 검토 끝에 내린 힘겨운 결단이었다.”(호암저전)
그해 3월 15일.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다는 선언문을 언론에 발표했다. 삼성은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고 좁은 국토의 4분의 3이 산지로 덮여 있는 데다 석유, 우라늄 같은 필요한 천연자원 역시 거의 없는 형편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교육 수준이 높고 근면하고 성실한 인적자원이 풍부해 그동안 이 인적 자원을 이용한 저가품의 대량수출 정책으로 고도성장을 해왔다. 삼성은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 기술을 요하는 제품 개발이 필요했다. 그것만이 현재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제2 도약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해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반도체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성장성이 클 뿐 아니라 타(他) 산업 파급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이런 반도체 산업을 우리 민족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은 국내외에 엄청난 격랑을 몰고 왔다. 미국 인텔은 삼성을 '과대망상증'에 걸린 환자에 비유했다.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미쓰비시는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과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 자본, 삼성전자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 등을 들며 삼성 반도체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실패하면 국내 경제 전반에 위기가 올 수 있다고 다수가 걱정했다. 정부 부처 간에도 삼성의 반도체 투자를 놓고 찬성과 반대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회고.
“삼성은 언제나 새 사업을 선택할 때는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등이 그것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보면 현 단계에서 국가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호암자전)
이 회장은 그동안 반도체 사업 투자를 세심하게 검토했다. 기술 추세와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미국과 일본 전문가를 비롯해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수렴했다. 1982년 10월부터는 반도체, 컴퓨터 사업팀을 구성해 이미 개발한 제품 성능과 원가, 가격, 시장 동향 등을 조사했다.
또 반도체와 컴퓨터 사업의 장·단기계획을 세워 매일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반도체 사업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회장은 정부가 적극 뒷받침해 준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무렵, 삼성은 이미 반도체 사업에 투자를 한 상태였다. 그룹 차원이 아니라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사재를 털어 1974년 12월 6일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회고.
“나는 어려서부터 전자와 자동차 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사다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특히 1973년에 닥친 오일쇼크로 큰 충격을 받은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고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반도체라는 이름에 마음이 끌렸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였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했다.”(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한국반도체는 한국 최초의 전공정 반도체 제조 업체였다. 재미 공학자 강기동 박사와 당시 통신장비 수입상이던 켐코(KEMCO) 김규환 사장이 1974년 1월 설립했다. 자본금은 100만달러.
강기동 박사는 경기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반도체 연구소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 모토로라에 입사해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술을 연구했고 1973년 귀국해 한국반도체를 세웠다. 강 박사는 국내 처음 전자손목 시계용 반도체 칩을 개발해 이를 생산했다. 하지만 1973년 오일쇼크 한파로 곧바로 부도 위기를 맞았다. 자금난을 이기지 못해 이듬해 이건희 당시 삼성 부회장에게 지분 50%를 매각했다. 삼성은 1977년 한국반도체 나머지 지분 50%를 인수했고 1978년 3월 2일 상호를 삼성반도체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강 박사는 한국반도체를 그만 둔 후 미국에 돌아갔다. 그는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설립에도 자문역할을 했다.
강기동 박사의 회고.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자문보고서를 잘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사업의 전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현대 내부에 이견이 있었다. 현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나는 미국으로 돌아와 '현대전자 사장직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현대 측에 전했다. 이에 정 회장이 현대전자 사장에 취임했다.”(강기동과 한국반도체)
삼성반도체는 1980년 삼성전자와 합병했고 1982년 11월 경북 구미에 있던 한국전자통신과 합병해 삼성반도체통신으로 거듭났다.
삼성반도체통신 사명(社名)과 관련한 일화.
삼성반도체 김광호 당시 상무(전 삼성전자 부회장)는 사명을 삼성통신반도체(주)로 정해 이를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
“새 사명을 본 이병철 회장이 대뜸 '통신이 왜 앞에 있노. 삼성반도체통신으로 해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삼성반도체통신으로 한 것입니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이 회장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도쿄선언 발표 6개월 전부터 반도체 공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이 회장의 회고.
“반도체 공장 입지 조건은 까다롭지만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정상급 고도기술 인력 취업이 곤란하다. 서울은 인구집중 지역이므로 넓은 부지는 구하기 어려운 실장이다.”(호암자전)
이 회장은 부지 선정 기준으로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 △공기가 맑고 물이 많은 지역 △고속도로 진입이 쉬운 곳을 제시했다. 이 기준에 따라 경기도 용인면 기흥면 일대를 후보지로 선정했다. 이 회장은 이곳을 이건희 부회장 등과 사전에 답사했다. 그리고 “좋다”고 승인했다.
삼성은 이 지역 토지매입을 위해 토지조사팀을 구성해 용인군 기흥면 일대 토지 약 30만m2를 1차로 매입했다. 이 일에는 현지 중개인을 앞세웠다.
사전에 '어디서 땅을 대량 매입한다'는 소문이 나면 해당 지역과 인근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토지 용도 등은 비밀에 부쳤다. 호암의 꿈이 담긴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