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테베의 왕 라이우스는 왕자가 자라면 자신을 죽인다는 신탁을 받는다. 양치기에게 왕자를 맡기고 죽이라고 명령한다. 양치기는 차마 죽이지 못해 왕자를 버려두었는 데 어느 부부가 구해 양자로 키운다. 그가 오이디푸스다. 성인이 된 어느 날 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인지 모르고 라이우스를 죽인다. 결국엔 테베의 왕이 되고 자신의 친모와 결혼까지 한다. 훗날 진실을 접한 그는 두 눈을 찔러 자신을 벌하고 방랑길에 오른다.
우리는 시장경제와 이성, 과학의 힘으로 진화하고 발전했다. 기계 등 기술 장치를 고도화했다. 물론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경우에만 삶에 편입했다. 삶은 갈수록 편해졌지만 개인은 간단한 장치조차 직접 만들지 못한다. 어떤 물질로 이뤄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사용법도 갈수록 쉬워지고 있다. 화면을 접촉하거나 자판을 두드리는 등 간단한 동작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양한 경제, 사회 활동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디지털 시대에 바보가 되어 가는 것일까.
반면에 인공지능(AI)은 사람의 육체 활동을 넘어 정신 활동까지 대체, 모방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GPT 등 생성 AI가 화두가 되고 있다. AI알고리즘은 그 수준이 높을수록 어떤 결과를 내놓을 지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예측과 능력을 넘어 우리 사회에 편익을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되었을 때의 위험이 부각되는 등 두려움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우리가 만든 AI의 위험이 계속 커진다면 우리를 심각하게 위협하지 않을까. 오이디푸스가 그랬던 것처럼 AI 세상을 만든 우리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면 AI를 포기해야 할까. 과거로 돌아갈까. 자본, 기술로 끊임없이 시장을 키워야 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포기해야 할까. 그래선 안된다. 성장을 멈출 수 없다. 멈추면 부익부 빈익빈 등 온갖 문제가 드러난다. 갈등과 분쟁이 격화된다. 성장은 인간 진화의 자연스런 사회 현상이다. AI는 성장을 위한 기술로 그 연장선에 있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디자이너 토머스 트웨이츠의 실험을 보자. 걱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임을 잠시 멈출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염소처럼 보이려고 풀을 소화하는 기계와 의족을 만들어 몸에 부착했다. 그렇게 염소가 되어 알프스 농장에서 염소들과 생활했다. 하나 더 보자. 간단한 토스터기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400여개 부품에 필요한 철, 구리, 플라스틱, 운모, 니켈 등 원재료를 구했다. 철광석을 구해 흙으로 된 굴뚝, 타일조각, 진흙 등을 이용해 철을 제련했다. 바위에서 칼을 이용해 운모를 채취했다. 폐품을 녹여 플라스틱을 구했다. 광산폐기물 웅덩이에서 금속이 녹은 물을 전기분해해 구리를 얻었다. 동전을 녹여 니켈을 구했다. 토스터기에 필요한 전기회로를 구성하고 직접 만든 나무틀에 녹인 플라스틱을 부어 토스터기 외부를 만들었다. 대단한 노력이다. 식빵을 넣어 작동시켜 보았는데 얼마 못가 고장이 났다.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토마스 트웨이츠의 실험은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과학기술로 이룬 문명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의 실험처럼 사람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기술장치 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과학기술과 그에 바탕한 산업과 시장 발전이 성장을 위한 수단과 전략이다.
AI 이외에 대안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놓기에 기존의 기계에서 나오는 위험과 차원을 달리한다. 위험의 의미, 성격과 효과를 다시 정의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테베 왕 라이우스의 비극을 피하고 우리가 살 길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