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종합반도체기업(IDM)이 미국 기업의 대당 최고 수백억원에 달하는 장비를 구입하면서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으라는 것인데 상식적이지 않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0월 개시한 대(對)중국 미국산 첨단 반도체와 장비 수출 통제 규제 관련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 나오는 비판의 목소리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미국 기업 장비를 구매하면서도 규제 유예를 간청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문제인식이다.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끊임없이 우리 정부와 기업을 압박하고 있고, 중국과 거리를 둘 것을 강요한다. 대중국 규제에 불만을 품은 중국 정부는 자국 내 미국 마이크론 판매 규제에 이어 전력·통신 반도체 핵심 원료인 갈륨 수출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중국 시장에서 마이크론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이 줄어드는 만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기회다. 그러나 마이크론 빈자리를 한국 기업이 채우는 것을 자제하라는 미국 정부의 요청은 부담이다. 또 중국이 미 제재 맞대응격으로 갈륨 수출 통제를 장기화할 경우 우리나라 반도체 생산·유통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정부와 기업은 반도체 산업 관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입장 표명 없이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미국 정부의 규제를 따라야 하는 미국 반도체 기업의 최근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엔비디아와 인텔은 각각 중국용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따로 설계해 중국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최대 반도체 시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전략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구매액은 1800억달러(약 227조원) 규모로 세계 수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양국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테슬라 일론 머스크, 스타벅스 랙스먼 내러시먼, JP모간 제이미 다이먼 등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방중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도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은 최대 시장이자 주요 메모리 반도체 생산기지다.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 SK하이닉스 D램 40%와 낸드플래시 2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물론 미국산 반도체 장비 확보 없이 반도체 생산이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우리 기업과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 서로 등가의 이익을 교환하거나 동일한 대우를 교환하는 '상호주의'에 입각해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상호 제재와 견제는 양국 모두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자국 우선의 목적이 있다. 우리도 특정 국가에만 보조를 맞출 필요가 없는 이유다.
미국과 중국 정부의 요청을 들어줄 경우 우리나라에 돌아올 몫도 분명히 요구하는 처신이 필요한 때다.
박종진 기자 trut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