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주간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웨스트(Semicon West)에 참가하고, 미국 반도체 산업 도시를 돌면서 300명 이상 고객을 만났다. 회사가 하는 사업이 반도체 중고장비가 주력이라 반도체 업계 누구를 만나더라도 할 이야기 거리가 많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장비회사부터 작은 리퍼비셔까지 4개 도시를 돌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상담하니 또 느낌 달랐다. 역시 “답은 현장에 있었다.”
10여년 전만해도 세미콘 웨스트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전시회였지만, 미국의 반도체 공장(팹) 투자가 줄면서 전시회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그 위상을 잃어왔다. 그러던 미국에서 반도체 전시회 규모가 전년대비 30% 이상 커졌다. 세계적 불황 때문에 장사는 별로 안되는 데 전시회 규모는 훨씬 더 커진 것이다. 지난 1년간 미국, 한국, 중국, 대만, 동남아, 유럽 어떤 반도체 전시회를 가도 사람이 몰리고 있다. 공격적인 반도체 팹 투자와 각국 정부의 파격적 지원이 세계적 트렌드가 돼 버렸다. 반도체 공급난 이후 반도체가 석유를 대체하는 21세기 전략물자가 되면서 국가대항전 성격이 강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지난 해 8월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이 돌아왔다”라고 외치며, 520억달러짜리 반도체 법에 서명했다.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이 아직도 반도체 공급망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반도체 생산에서는 “고급 반도체 생산이 0%”라고 자평하듯이 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대만, 한국에 뒤쳐져 있고 중국한테도 쫓기고 있다. 지난 20여년간 반도체 팹 투자가 적어 존재감이 희미해지던 미국이 각성하고 삼성전자, TSMC 등의 반도체 팹을 유치하고, 인텔, 마이크론,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이 미국 투자를 늘리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팹 건설붐을 타고 미래 투자를 위해 준비하는 기업, 정부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전시장에서는 미국 지방 정부들이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려고 부지런히 기업을 찾아다녔다. 미국 상무부 사람들을 만났더니 지금은 대기업 위주로 반도체 지원법(CHIP Act)에 따른 정부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가을에는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발표한다고 한다. 미국도 반도체 생산 생태계 전체를 다시 복원하려는 계획을 야심차게 가동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투자하는 텍사스 오스틴 지역과 TSMC가 투자하는 애리조나 피닉스 지역은 투자 열기가 후끈했다. 야간 근무가 없는 미국 건설 노동자들이 24시간 특근을 하면서, 늦은 오후에도 오가는 차량들이 길을 메웠다. 현지 기업인들은 심각한 인력난과 물가폭등을 하소연한다.
세미콘 웨스트 600여개의 전체 참가사 중에 한국회사가 10%에 가까운 55개나 될 정도로 크게 늘었다. 몇 년 전까지 급증하던 중국회사는 10여개사만 참가했다. 미·중 갈등이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격렬하게 디커플링(탈동조화)을 만들어내고 있다. 요즘 중국 수출이 줄어 현지 진출을 고민하는 한국 반도체 회사들도 많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회사도 많이 보인다.
미국의 세계적 반도체 회사들은 만나봤더니 삼성전자, TSMC와 함께 동반진출하는 한국과 대만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한국과 대만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도체 소재·부품을 국산화한 솔루션을 도입해 원가절감을 하려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격에 상관없이 미국산을 선호했던 분위기라면 지금은 가격경쟁력이 있는 한국, 대만산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인 소부장 업체들도 중국 구매 비중을 줄이고 한국, 대만, 일본, 동남아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10년전에는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 소부장 회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는 데, 요즘은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 회사들이 부쩍 늘었다. 지난 20여년간 한국 소부장 회사들도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최근에는 중국산 대체수요까지 겹쳐 미국과의 거래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 반도체 팹 투자에 대한 회의론도 있다. 삼성전자와 TSMC의 팹 건설 비용은 최초 계획보다 크게 늘었다. TSMC의 미국 팹 건설비용은 대만에 비해 4배 이상 들어간다고 한다.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하는 비용이 대만보다 두배 이상 들어갈 것이라 예측했다. 이런 미국의 고비용 구조가 아무리 정부가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지속가능할 지 의문이다.
이름도 생소했던 지정학이 뜨고 있다. 이제는 지정학의 시대라고 한다. 대만에서 전쟁이 날 지, 중국 경제는 이제 진짜 내리막 길인지, 미국 달러 패권은 계속 갈 것인지, 사업환경이 순식간에 바뀌고, 패권경쟁이 비지니스의 영역을 쥐락펴락한다. 투자 의사결정 하나 잘못하고, 수출 규정을 잘못 지키면 회사가 휘청할 수도 있다. 작은 중소기업도 지정학까지 공부해야 하는 복잡한 세상이 힘겹지만, 이런 지정학적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됐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필자〉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30년간 40여개국 지구촌 구석구석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2000년 기업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했다. 서플러스글로벌은 2018년 포브스 아시아 200대 유망 기업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