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이상고온과 집중호우 현상이 나타나는 등 기후변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주요국은 탄소중립을 새로운 통상장벽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올 해에만 무려 43건 환경규제 정책을 지침·규정으로 제정할 예정이다. 문제는 이런 규제가 단순 구호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기술과 접목해 보다 엄격하고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국제무역통상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EU 환경규제 중 기업에 가장 부담이 될 것으로 평가된 것 중 하나가 '에코디자인규정'이다. 이와 관련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지난달 기업 대상 조사 결과, 에코디자인규정 핵심내용 '디지털제품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s·DPP)'을 적극 모니터링하는 기업은 전체 3% 수준에 불과했고, 전혀 모르는 기업이 44.8%에 달했다.
DPP는 EU국가에 수출되는 전자제품에 탄소량 등 디지털 정보를 탑재하도록 하는 규제로, 2026년부터 제품 그룹별로 순차 적용될 예정이다. 원료 채굴부터 최종 제품 생산, 수출할 때까지 제조·물류 등 전 과정에서 배출 탄소배출량과 원산지 등 정보를 추적하고 디지털로 전송해야 하는 데 개별 기업이 이런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은 공급망 전반에 친환경 리스크 등 관리를 요구하며 선제 대응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전기전자산업협회(ZVEI), 엔지니어링협회(VDMA) 등 기관이 협력해 제품 생산에 소모된 탄소량 정보를 간단한 휴대폰 스캔으로 실시간 계산해 알려주는 시스템을 올해 하노버메세 박람회에서 시연했다.
이에 비해 우리 기업은 글로벌 환경규제 이해가 부족하고 대비도 많이 늦은 감이 있다. 국내 주요기업은 관련 동향을 개별 모니터링하는 수준이며, 공급망 내 기업간 데이터 생태계 구축 논의도 이제 시작단계다.
그렇다면 탄소중립, 순환경제와 같이 당위성이 짙은 구호 속에서 강화되는 글로벌 통상전쟁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무엇보다 기업 디지털 전환(DT)을 가속화하고 산업내·산업간 디지털협력 기반을 조속히 구축할 필요가 있다.
먼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탄소배출을 저감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전 산업부문에 빠르게 확산해야 한다. 제조공정에 인공지능(AI)과 제어기술을 도입하고 제품 개발 과정에서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물리적 실험을 대체하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요 제품 생애주기 정보와 이력을 추적하는 관리체계를 갖춰야 한다. 각종 규제에 대응하려면 탄소배출 저감에서 나아가 여러 지침에서 요구하는 형식에 따라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조기업이 제품 생산·이용·폐기·재사용 등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고 기업, 국가간 데이터 생성 및 교환이 가능한 디지털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비중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수출 의존적 국가다. 미국·유럽 등의 통상규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여부가 국가경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소리 없는 통상전쟁에서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적극적인 디지털 전환으로 각종 환경규제에 대응할 기반을 마련한다면, 기업 공급망 관리 등 각종 영역에서 생산성·유연성을 향상시켜 오히려 지금 위기를 기업 체질 개선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통상규제 대응을 위한 디지털 전환에 부처와 영역을 초월한 국가차원 논의와 대응이 시급한 때다.
고서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상임부회장 koita9000@koi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