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삶이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왜 이리 빡빡할까. 서울에서 부산까지 조선시대엔 10일에서 20일 걸렸다. 지금은 기차로 3시간 내다. 그렇게 아낀 시간에 쉬지 못하고 딴 일을 한다. 기차에서도 휴대폰, PC로 일을 본다. 옛날이면 풍경 감상이나 휴식하며 갔을 길이다. 어떤 삶이 행복한가. 그래도 지금이 낫다. 현대인은 기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이다. 기술은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울창한 숲, 깊은 땅속, 흐르는 강물 등 자연에서 광물, 에너지를 비롯해 삶에 필요한 자원을 끌어낸다. 자원을 이용해 통신 및 전자기기, 건축물, 자동차 등 기술 장치를 만든다. 기술의 본질은 자연을 자원으로 만들어 인간에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붙이는 '닦달'이다.
사람은 어떻게 될까. 사람은 자연자원을 몰아붙이는 노동을 제공한다. 자연자원이 고갈, 포화가 되는 한계상황에선 사람도 부품화의 과정을 걷는다.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정의한다. 자연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성과를 위해 업무자동화 등 혁신과 인건비 등 비용절감을 추진한다. 쓸모 여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고용 여부를 결정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동료의식이 강했다. 부하가 하는 일은 상사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하가 스스로 할 수 있게 정성껏 가르쳤다. 평생을 같이 하는 관계다. 늙어선 그간의 기여와 경험으로 존중받았다. 지금은 다르다. 쓸모를 기준으로 취업과 퇴사가 결정된다. 쓸모를 갖추기 위해 전문화가 중요했다. 동료가 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갖춰야 살아남았다. 협업을 할뿐 비법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부하가 하는 일을 상사라도 대신하기 어렵다. 기한과 품질을 맞추라고 닦달할 뿐이다. 부하직원을 격려하듯 원하는 것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고가 터지면 왜 그랬냐 나무란다. 책임에서 빠져나간다. 책임질 이유도 없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승진해도 그전과 똑같이 일한다. 전문성을 놓칠까 불안해서다. 여기서 '대리급 임원'이라 불리는 사람이 나온다. 그것도 어느 정도 지나면 쉽지 않다. 그때부턴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무기화한다. 시중에는 그럴듯한 처세술을 담은 자기계발서가 넘친다. 어느 순간 열심히 읽어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닦달은 직장내 괴롭힘 금지 입법이 이뤄지면서 어려워지고 교묘해진다. 감사, 징계 등 공적 시스템을 악용하기도 한다. 닦달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특이점에선 평판을 떨어트리는 '뒷담화'가 나오기도 한다. 상사에 대한 존중도 없어지고 고소, 고발이 난무한다.
디지털 시대에 기술발전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요가 없어도 기술이 개발되면 상품이 나오는데 '존재하지 않는 수요'를 만들라고 닦달한다. 시장 출시시기, 방법 등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 자연스럽게 없는 수요를 만드는 것을 혁신이라 포장한다. 수요를 만들지 못하면 혁신성이 떨어진다며 닦달한다. 허위 과장 광고, 불완전 판매 등 억지수요를 만들려는 행위는 처벌된다. 데이터 수집, 분석을 통해 고객 수요를 찾는다. 고객은 끊임없이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과 서비스를 사라고 닦달을 당한다.
물론 고객도 기업을 닦달한다. 불량을 참던 시대는 지났다. 온라인 접속이 쉽고 의견 표출 기회가 많다. 작은 하자에도 소리를 높여 기업 담당자를 닦달한다. 과격한 후기를 남긴다. 시민단체에 제보한다. 민원을 내고 소송을 제기한다. 산업화시대에 숨죽였던 민주화가 압축적으로 이뤄지면서 권리의식이 갑자기 높아진 탓도 있다.
층간 소음, 주차 분쟁 등 권리와 권리가 맞부딪치는 곳에선 거친 닦달이 오간다. 감정 충돌을 거쳐 법적분쟁이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끝을 본다. 이것이 옳은가. 닦달보다 양보와 배려가 먼저다. 현대 기술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팽개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면 미래는 없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