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은 책임지고 이 과제를 완수하시오.” 1986년 8월 22일 오전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초고집적 반도체 기술 공동개발(안)'을 재가하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국가 미래가 걸린 지상과제였다. 전학제 과학기술처 장관과 기술개발 책임자인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은 이에 앞서 전 대통령에게 공동개발(안)을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재가 서류 표지에 굵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자통신연구소 소장은 전 연구원의 인사권을 장악해야 하며 3사는 공동운명체로서 연구소장의 지휘에 순응 협조해야 함.”
국가 반도체 기술인력을 총동원한 초대형 4M D램 국가 연구개발(R&D)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이 사업을 “대통령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전두환 대통령의 강력한 반도체 개발 의지가 없었다면 추진이 불가능한 대형 국책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회고. “4M D램 개발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관련 대기업들의 공동 연구개발이 선행해야 함은 물론이고 범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경쟁이 치열한 국제 반도체 시장 상황을 볼 때 국내 어느 한 기업이 나서서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삼성 이외에 금성과 현대를 참여시키자는 방침을 정했다. 일본은 D램을 만드는 업체가 10개가 넘었다. 4M D램 개발사업을 정부가 지원하기에 앞서 3개 국내 기업의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선결과제였다. 이들 기업은 각자 연구소를 갖추고 나름대로 이미 많은 투자를 한 상태였다. 특히 삼성은 몇 년간 대규모 투자를 통해 1M D램 개발을 완료한 상태였다. 나는 이병철 삼성 회장과 정주영 현대 회장, 구자경 금성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반도체를 공동으로 개발할 것을 권유했다. 아울러 이 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개발 비용의 상당액을 정부에서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도체산업은 국가경쟁력 확보와 경제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전두환 회고록)
이 연구개발 사업은 박승덕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조정실장이 총괄했고 강민호 과학기술처 전기전자연구조정관이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 4M D램은 막대한 설비 투자를 해야 하는데 국내 기업들은 이를 놓고 고민했다. 4M D램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범정부 차원의 지원과 대기업의 공동 연구개발이 필수였다.
박승덕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의 말. “4M D램 개발은 1986년 8월부터 1989년 3월까지 30개월이고 연구비 총액은 879억원, 연구인력은 670명에 달하는 국가 초대형 과제였다. 과학기술처는 이를 대통령 프로젝트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과 홍성원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정홍식 경제수석실 행정관 등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살며 생각하며)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의 증언. “관련 부처 협의를 통해 총 400억원 규모의 연구개발비 가운데 300억원은 체신부가 부담하고 나머지 100억원은 과학기술처가 내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도에 대해 상공부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제동이 걸렸어요.”
상공부는 “전자산업은 상공부 소관인데 왜 직접 관련이 없는 체신부 산하 전자통신연구소가 총괄연구기관을 맡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상공부가 이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상공부는 또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해 연구조합이 연구개발 사업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대해 “4M D램 같은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고가의 장비를 구입하고 시설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 일을 생산업체 단체인 연구조합에서 어떻게 하느냐. 연구개발은 연구소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기술 축적이 어렵다. 반도체 개발 경험이 있고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전자통신연구소가 총괄연구기관을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체신부도 전자통신연구소가 이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입장이었다. 오명 당시 체신부 장관의 회고. “당시 TDX에 들어가는 반도체 역시 비싼 돈을 주고 외국에서 사다 쓰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통신을 담당하는 체신부가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반도체를 연구하는 전자통신연구소가 계속 개발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과학기술처도 내 견해에 동의했다.”(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이 문제는 내부 논의 결과 조합은 막대한 연구개발 투자비를 부담하기 어렵고 공동 연구개발 결과물인 기술 축적도 어렵다는 이유로 전자통신연구소가 개발사업의 총괄연구기관을 맡기로 최종 정리했다. 개발 주도권을 놓고 관련 부처들이 줄다리기를 하는 바람에 6개월을 허비했다.
공동개발에는 연구개발비 400억원과 연구기자재 구입비 479억원 등 모두 879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했다. 연구비 400억원 가운데 과학기술처가 특정연구개발 사업에서 100억원, 체신부가 200억원, 3개 참여 업체가 100억원을 각각 부담했다. 체신부는 애초 300억원 부담에서 200억원으로 줄었다. 체신부 200억원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부담했다. 연구기자재 구입비 479억원은 석유안정기금에서 200억원을 지원받고 나머지 279억원은 기업에서 부담했다. 이런 연구개발비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전자통신연구소 책임 아래 반도체 3사는 1986년 10월부터 4M D램의 공동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공동 연구개발 목표는 0.8㎛ 선폭의 4M D램 반도체 개발이었다. 설계와 공정, 조립 등 생산기술과 관련한 기본 기술을 개발한다는 게 목표였다.
정부는 우선 3단계로 나눠 4M D램 반도체 기술을 개발했다. 1986년 8월부터 1987년 3월까지 1단계로 1.0㎛ 선폭의 1M D램급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이어 1987년 4월부터 1988년 3월까지 2단계로 1.0㎛ 선폭의 4M D램 반도체 기술을 개발했다. 마지막 3단계는 1988년 4월부터 1989년 3월까지 0.8㎛ 선폭의 4M D램 반도체 기술을 개발했다.
설계와 생산 기본 기술개발은 삼성·금성·현대가 기술과 시설능력에 따라 개발을 분담하고 전자통신연구소는 연구개발 관리와 설계 생산 기본 개발을 지원하며 연구개발 전반을 총괄했다. 서울대 부설 반도체공동연구소는 연구인력 지원과 양성, 기본기술의 기초연구를 담당했다.
연구는 분담연구, 합동연구, 개별연구 등으로 구분했다. 기본기술은 분담하고 설계 기술은 공동으로, 생산기술은 개별 연구했다. 공동연구는 기업체의 연구인력들이 한곳에서 기술을 개발했다. 생산기술은 업체별로 독자 개발했다. 분담 연구한 기술은 조합사가 상호 활용하고 합동연구 기술은 기본내용을 공개했다.
공동연구에는 모두 670명이 참여했다. 설계기술에 100명, 기본기술 400명. 생산기술 110명, 연구관리 60명 등이었다.
정부는 효율적인 연구관리와 업무 조정을 위해 전자통신연구소에 자문위원회를 설치, 주요 정책을 조정했다. 위원장직은 경상현 전자통신연구소장이 맡았다. 자문위원은 관계부처 국장과 한국반도체연구조합 이사장, 반도체 3사 연구소장, 대학교수, ETRI 연구원 등으로 구성했다.
연구소는 기술 분야 등에 전담 책임자를 지정해 소관 연구개발 업무를 종합하고, 업체 간 연구 업무를 조정했다.
연구한 기술은 참여 업체와 정부 공동 소유로 하고 국가가 지정하는 제3의 기업에도 이를 공개하며, 참여 업체는 기술을 상호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관계 부처 지원 업무도 명확히 규정했다. 경제기획원은 정부 부담 소요 예산을 지원하고 상공부는 개발한 기술 활용과 제품화, 해외 시장 진출을 지원키로 했다. 체신부는 연구비를 지원하고 과학기술처는 특정 연구과제를 수행키로 했다.
경상현 소장은 매년 6월 과학기술처 장관에서 반도체 공동 개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총괄 연구책임자는 경상현 소장이고 사업책임자는 첫 해는 안병성 박사, 그다음은 김정덕 박사가 담당했다.
삼성전자의 사업 책임자는 이윤우 상무, 현대전자산업은 박광오 반도체연구소장, 금성반도체는 최민성 LG기술연구소장이었다.
1988년 2월 8일 드디어 4M D램 회로설계와 공정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박긍식 과학기술처 장관과 경상현 소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4M D램 개발 성공을 보고했다. 이 자리에는 오명 체신부 장관, 박영철 청와대 경제수석, 홍성원 과학기술비서관, 박승덕 과학기술처 연구조정실장이 배석했다.
청와대는 이날 축제 분위기였다. 4M D램 개발은 세계 세 번째였다. 이 기술 개발로 일본과의 기술격차는 6개월로 줄어들었다. 4M D램 공동 연구개발은 시작도 창대했지만 결과는 더 창대했다. 4M D램 개발은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직항로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