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하려고 들지 않아. 이거 이렇게 하면 다 답이 나온다고. 해봐 직접. 그리고 내가 바빠 죽겠는데 뭐 이렇게 기대기만 해'와 같이 구박을 엄청해요. '이것 좀 봐줄래?' 이러면 '알았어' 해놓고 안해줘요. 내가 배워서 하지...”
경기도 사는 전업 주부 최모씨(66세)가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팀과 인터뷰 했을 때의 하소연이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묻는 부모님의 요청에 자식은 퉁명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매일 같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이지만 고령층에겐 진입장벽이 높다.
“사진은 못 찍어요. 딸이 가르쳐줬는데도 또 잊어버려요. (충북 82세 김모씨 주부)” “이메일은 내가 할 줄 몰라요. 이메일 계정은 있죠. 근데 아들이 해줬어요. (인천 69세 김모씨 화장품 외판 및 기초수급)”라는 말처럼 고령층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려고 자녀에게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조사에 따르면 고령층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다가 잘 모르거나 문제가 생기면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73.2%)'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전문 인력이나 인터넷 정보검색, 친구 도움 대비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족이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고, 가깝기 때문일 것. 하지만 맹점이 있다. 사회가 파편화되고 가족 해체가 가속화하면서 고령층이 가족에 의존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게 서서히 디지털 세상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전자참여지수 1위 △인터넷 소매업 매출 지표 1위 △스마트폰 보유율 상승 4위 등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서 63개국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 디지털 경쟁력 평가' 8위에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의 '그늘'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이 등장하면서 디지털 격차는 가속화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수용할 수 없는 세대나 계층의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더 늦기 전에 공교육과 공공 서비스로 꾸준한 기술 교육과 포용 정책을 전개,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코로나19로 확대된 IT 환경...디지털 격차 심화
우리나라의 디지털 전환 속도는 매우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정보기술(IT)이 생활 깊숙이 침투해있다. 이제 식당에 가도 종업원에게 메뉴를 주문하지 않는다. 키오스크에서 주문하고 결제까지 마친다.
젊은층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 고령층에겐 낮설다. 키오스크 활용법을 제대로 모르지만 젊은이들에게 묻기엔 망설여진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한 고령층은 당황스러움과 자존감 하락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분노한다. 이같은 감정은 우울과 고립감을 악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편리하게 하는 디지털 '전환'이 고령층에겐 '디지털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장애인, 저소득층, 농어민, 고령층 등 4대 정보 취약 계층 가운데 고령층의 디지털 격차가 보다 심각한 것으로 파악됐다. 취약 계층 전체 디지털 정보화 수준은 평균 76.2%(100% 만점)이지만 고령층은 69.9%로 가장 낮았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디지털 변화의 바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격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더욱 심각해졌다. IT 기반 비대면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은행이나 주민센터(동사무소)에서 생활 업무를 보던 고령층은 IT 세상이 만든 '단절'에 더욱 소외되고 있다.
디지털 격차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난 20여년 간 계속 바뀌어왔다. 1990~2000년대에는 디지털 기기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접근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디지털 격차 극복에 힘썼다. 이후 디지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거나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디지털 기술 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디지털 격차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스마트폰과 PC 등 기기에 대한 접근하도록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지리적 거리와 같은 환경적 요인이나 나이 등의 물리적인 이유로 디지털 활용 역량이 부족해 발생하는 디지털 격차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다 포용적인 디지털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포용' 정책으로 접근해야
그동안에는 디지털 활용 역량을 키우는 방법으로 교육이 첫 번째로 손꼽혔다. 특히 정부 주도로 고령층이 많은 농어촌 지역에 정보화마을을 지정하고 정보교육센터를 지원하는 등 고령 취약층 대상 디지털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다.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새로운 시각이다.
지금까지 디지털·정보기술(IT) 개발은 첨단에 초점이 맞춰졌다. 다른 서비스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도와 편리성은 기존 '디지털 기득권'에게만 해당된다는 지적이 많다. 처음부터 고령층을 포함한 정보 취약 계층을 고려한 기술 개발과 설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술을 개발하는 순간부터 디지털 격차 해소를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최근 광고·영상콘텐츠·B2C 서비스 등에 널리 활용되는 버추얼 휴먼(가상인간)과 AI 자연어 처리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면 고령층 대상 비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디지털 격차를 인정하고 노인 등 지원이 필요한 분들에겐 마치 사람과 대화하듯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맞춤형 환경을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AI와 같은 신기술도 처음부터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 활용할 수 있게 설계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자는 설명이다.
정부가 이르면 이달 발표할 '디지털 권리장전(가칭)'이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국민과 함께 세계의 모범이 되는 디지털 대한민국'을 비전으로 △세계 최고의 디지털 역량 강화 △확장되는 디지털 경제 △포용하는 디지털사회 △함께하는 디지털플랫폼 정부 △혁신하는 디지털 문화 등 5대 추진전략, 19개 세부과제를 마련해 추진한다.
디지털 격차가 있는 기술이나 서비스의 대체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대체요구권'이 디지털 권리장전에 실질적으로 반영될지도 관심이 쏠린다.
김 교수는 “장기간 국회에 계류 중인 '디지털포용법' 제정을 통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정책 주체와 책임을 명확히 해 차별없는 디지털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문실 NIA 디지털포용본부장은 “디지털은 이제 삶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다”며 “모든 계층이 보편적 권리로 누리도록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박종진 기자 truth@etnews.com,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