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은퇴한 아인슈타인'을 찾습니다

[ET시론] '은퇴한 아인슈타인'을 찾습니다

한낱 투박한 돌덩이에 불과한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장 값비싸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광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브릴리언트 컷(Brilliant Cut)'이라는 가공과정을 거쳐야 한다.브릴리언트 컷은 20세기 초 등장한 가공방법으로, 반짝거림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석을 58면체 다각으로 깎아내는 기술이다.

원석을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만으로 보석의 값어치가 급등하는 브릴리언트 컷을 생각하면, '특허심사'라는 행정행위야 말로 혁신적 기술을 독점·배타적 재산권으로 탄생시켜주는 '새로운 지식의 브릴리언트 컷'이 아닌가 싶다.

특허제도는 1623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전매조례(Statute of Monopolies)가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전매조례에 이끌린 당시 유럽 대륙의 혁신가들이 대거 영국으로 유입됐다. 이는 방직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고,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으로 이어져 18세기 제1차 산업혁명 발생의 밑거름이 됐다.오늘날 현대적 특허심사를 포함하는 특허제도는 미국이 확립했다. 미국은 1853년 심사주의를 채택했고, 특허권을 활용한 에디슨의 초창기 전기산업 투자 등으로 이어져 제2차 산업혁명으로 확대됐다. 이 때 탄생한 선진 특허제도는 그 영향력이 현대까지 이어져 미국이 기술 초강대국이 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심사'라고 하는 일련의 행위는 인간의 지적활동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태권도 승단 '심사', 출입국 '심사', 법안 '심사' 등 우리 주위에는 무수한 종류의 '심사'가 매순간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특허심사가 다른 '심사'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특허심사관이 출원된 발명과 관계된 지구상 모든 기술분야의 지식을 찾아 일정한 규칙(특허심사 기준)에 따라 출원된 발명과 대비를 하고 고도의 사고과정을 거쳐 특허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특허심사관이 찾아야 할 지식이 도서관 한 켠에 쌓인 책 더미나 발품을 팔아 가면서 듣거나 보는 정도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는 지식 2배 증가 곡선(Knowledge Doubling Curve)을 제시하면서, 20세기 초까지만해도 100년마다 2배씩 증가하던 인류 지식의 총량이 2030년에는 3일마다 2배씩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실제로 매년 580만 건 이상의 신규 문헌이 누적되고 있으며, 특허빅데이터 분석을 위한 통계 대상건만 해도 5억3000여건에 달한다. 이는 특허심사 과정에서 검토해야 할 지식의 양과 범위가 과거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식의 형태도 이종(異種) 지식들이 복잡하게 결합된 융·복합 지식이 글로벌 산업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수준 또한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는 웨이퍼 제조부터 패키징에 이르는 8대 핵심공정을 통해 생산되는 데, 1개 반도체가 만들어지기까지 화학, 전기·전자 등 여러 기술분야가 유기적으로 관여돼 있으며, 기술 난이도는 현장의 베테랑이 아닌 이상 따라가기 어렵다. 이차전지 역시 마찬가지다. 특허기술분류에 따른 이차전지 관련 기술은 무려 21개 분야에 이른다. 최신 첨단기술의 '특허성 판단'을 위해서는 세분화된 기술범위에 대한 고도로 전문화된 숙련자의 분업·협업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서 우리기업의 핵심기술을 빠르고 강력하게 보호하기 위해 특허심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은 명확해진다.

우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발명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도록 특허심사관의 확충이 필수다. 심사관의 수는 곧 심사의 속도와 직결되는 데, 심사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업은 특허에 기반한 경영전략을 펼치기 수월하며 글로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고품질 특허심사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의 전문성도 요구된다. 특허권은 20년의 존속기간 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사로부터 '특허 무효화'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된다. 출원된 발명의 특허성을 정확하게 심사하기 위해 최신 기술 트렌드에 익숙한 현장의 전문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고숙련 전문 인력에 의한 신속·정확한 특허심사는 평범해 보이는 발명을 막대한 부가가치로 전환시킨다.

1867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하이만 리프먼이라는 소년은 '지우개 달린 연필'로 다른 연필 제조사보다 먼저 특허를 받고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특허심사관이 하이만의 발명을 '지울 수 있는 도구가 부착돼 편의성을 향상시킨 필기구'로 해석하지 않고, '단순히 지우개만 부착한 연필'로 판단했다면 특허성의 결여로 하이만의 특허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속·정확한 특허심사에 의해 탄생되는 고품질 특허는 핵심기술을 빈틈없고 실효성 있게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법률적 장벽을 제공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글로벌 바이오 테크놀로지 기업으로 급부상한 모더나는 mRNA 백신 기술 석학인 로버트 랭거 MIT 교수를 포함한 4명의 창립멤버로 2010년에 설립된 조그만 벤처기업이었다. 로버트 랭거 교수는 약 1400여건 특허를 출원 또는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특허를 중요시했으며, 그가 설립한 모더나 역시 핵심기술을 꾸준히 특허로 보호해왔다.

만약 모더나가 mRNA 백신 기술에 대한 핵심특허들을 보유하지 못했다면 북미, 유럽에 걸쳐 자회사만 17개나 되고 직원수가 5000명이 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머크(Merck)와 같은 글로벌 제약사와의 협업이나 전략적 제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치열한 기술경쟁에 놓여진 우리기업의 핵심기술을 선제적으로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특허청은 신속·정확한 특허심사를 위한 지식재산 혁신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올해 초 반도체 전문 특허심사관 30명을 신규채용하고 주요국 최초로 반도체심사추진단을 출범했으며, 올해 말까지 37명의 인력을 추가로 충원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혁신기술이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이차전지, 바이오 등과 같은 핵심기술분야에 특허심사 역량을 집중 투입함으로 대한민국이 글로벌 시장의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고자 한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상대성이론 창시자 아인슈타인의 원래 직업은 스위스 특허청 심사관이었다. 젊은 날 10년 가까이 특허심사관을 지낸 후 대학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벨상을 수상하고 상대성이론을 만들어 냈던 아인슈타인을 보면 특허심사관과 현장의 전문가나 과학자는 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23년 한국에서는 현장의 '과학기술자'가 공직에서의 '과학기술 행정가'로 활약하는 특허심사 생태계의 청사진을 그려본다.

이인실 특허청장

[ET시론] '은퇴한 아인슈타인'을 찾습니다

〈필자〉이인실 특허청장은 1985년 변리사시험에 합격해 38년간 지식재산 전문가로 활동해왔으며, 지난해 5월 민간출신 최초로 특허청장에 임명됐다. 부산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와 워싱턴대에서 법학석사, 고려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변리사연맹 한국협회 회장, 대한변리사회 부회장, 지식재산포럼 회장, 한국여성발명협회 회장을 두루 역임했으며, 지식재산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매니징 IP로부터 '2022년 지식재산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으로 선정됐다.

양승민 기자 sm104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