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전환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개방형 혁신(오픈 이노베이션)은 모든 기업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됐다. 국내 대기업과 중견기업 가릴 것 없이 저마다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투자·보육 기능을 강화하고, 디지털전환 혁신 역량을 외부에서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 2021년말 일반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을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시행 이후 CVC는 국내 벤처창업 생태계 주요 축으로 떠올랐다. CVC 도입으로 기업은 자체 개발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시장 잠재력이 높은 스타트업의 기술이나 제품 동향을 빠르게 파악하고 투자에 나설 수 있다. 전략적목적 투자(SI) 뿐만 아니라 재무적 투자(FI) 차원에서의 안정적 수익 확보도 기대요인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6월 발표한 '2023년 일반지주회사 소속 CVC 현황 분석결과'에 따르면 일반지주회사 소속 CVC는 제도 도입 1년 6개월 만에 12개가 새로 생겼다. GS, 효성, 동원산업, 세아홀딩스 등 대기업이 일반지주회사 소속 CVC를 신규등록한 것은 물론 대웅, 에프앤에프홀딩스, 평화홀딩스, 한일홀딩스 등 중견기업도 신규 등록했다.
CJ인베스트먼트의 일반지주회사 체제 내 편입은 상징적이다. CJ인베스트먼트는 지주회사 편입 이전부터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라는 창업투자사로서 문화콘텐츠 등 다양한 영역에서 꾸준히 투자해왔다. 그간 금산분리 원칙 훼손, 경제력 집중, 대주주 사익편취 가능성 등을 이유로 금지했던 대기업 지주회사 내 VC 보유가 허용되면서 생긴 변화다.
지주회사에 편입되지 않은 대기업 계열 CVC는 더욱 많다. 롯데벤처스는 물론 GS그룹 엑스플로인베스트, 신세계 시그나이트파트너스, 호반건설 플랜에이치벤처스 등이 대표적으로 최근 시장에서 영역을 확대하는 비지주회사 소속 대기업 CVC다. 카카오벤처스, KT인베스트먼트, 네이버 스프링캠프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이미 기업 내부에 CVC를 갖춘지 오래다.
기업이 외부 전문 투자·보육기관과 협업하는 사례는 더욱 많다. 특히 액셀러레이터와 협업은 개방형혁신을 추진하는 기업이라면 이젠 빼놓을 수 없는 절차다. 규모 있는 투자를 수행하는 벤처캐피털(VC) 보다는 독립계 액셀러레이터가 대기업으로부터 더 환영받는 분위기다.
씨엔티테크와 한국앤컴퍼니, 블루포인트와 한솔그룹 협업은 대기업과 액셀러레이터의 대표적 협업 사례다. 공동펀드 조성은 물론 사업화에 필요한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보육하는 일까지 전방위 협력이 이뤄진다. 디지털 전환을 이끌 기업을 외부에서 찾아낸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도 기업벤처 프로그램을 적극 도입해 디지털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민관협력 오픈이노베이션 사업은 대·중견기업이 제안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스타트업이 먼저 제안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기술실증(PoC)과 협업을 지원한다.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가 추진하는 이번 사업에서 DB손배보험은 펫보험서비스, 이륜차 보험가입 중계 플랫폼, 라디오커머스 서비스, 스마트글라스를 통한 증강현실 등 다양한 수요 분야를 제시했다. 롯데중앙연구소에서도 커피 유래 식품 부산물을 활용한 식품용 포장재 제조 기술을 찾는가 하면, 포스코인터내셔널에서는 기름야자(오일팜)를 대상으로 한 스마트농업기술을 발굴하는 등 전방위 협력이 이뤄진다.
해외 시장을 넘나드는 사례도 나온다. 로레알그룹은 스타트업 육성 프로젝트인 '빅뱅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한국에서 로레알그룹의 뷰티테크를 이뤄줄 디바이스 전문 스타트업을 찾기 위해 최근 재차 방한했다.
제시하는 과제도 구체적이다. △데이터 기반 자외선 차단제 개인화 기술 △혼합현실(MR)을 이용한 개인용 피부관리 디바이스 △약물전달을 위한 개인용 피부개선 디바이스 △피부 관련 작용 매커니즘과 성능 파악을 위한 도구 및 모델로 명시하고 있다. 어떤 아이템을 개발하는지 조차 비밀로 부치던 과거의 대기업 전략과는 크게 다른 양상이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 송윤섭 기자 sys@etnews.com